2011-12-29

[한겨레 기사돌려보기][세상 읽기] BBK, 디도스… 아직 살아있는 문제들 / 한정숙


[세상 읽기] BBK, 디도스… 아직 살아있는 문제들 / 한정숙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판결은
집권자를 향한 저돌적인 충성 외에
그 근거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한겨레
»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인기없는 정권에게 적당한 정도의 대외적 긴장만큼 고마운 일도 없다.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내부 문제를 덮기에 안성맞춤이고, 운이 좋으면 통치자가 사회통합의 구심체로 떠오를 수도 있다. 산업화로 인한 사회갈등이 심해져 가던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일부 자본주의 국가 집권자들이 그 해법으로 택한 것이 제국주의 정책이었는데, 이 유형의 제국주의를 사회제국주의라 부른다. 제국주의 정책은 아니지만, 남북한 집권자들도 분단 상태에서 비롯되는 충돌·긴장·돌발사를 자주 활용해 왔다.
이번 북한 최고권력자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권력교체도 한국의 집권세력에게는 호재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이명박 대통령처럼 운 좋은 사람도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12월19일 낮부터 모든 언론보도를 북한 관련 기사가 뒤덮었다. 특히 조문을 둘러싼 논란은 남북한 집권층에서 서로 부추긴다는 느낌을 주기에 딱 알맞았다. 10·26 지방선거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이 디도스 공격을 받은 사건도, 날치기로 통과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4대강 사업의 문제점도, 청년실업 문제도, 한나라당이 신장개업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까지 모두 묻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와중에 정봉주 전 의원이 비비케이(BBK) 문제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 확정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집권자를 향한 저돌적인 충성 외에 판결의 근거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사진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2007년 12월 초 비비케이 의혹의 정점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다음날 검찰이 '혐의 없음'을 발표한 뒤 그가 활짝 웃는 장면이다. 첫째 사진은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당당하고 결연한 표정이 아니라, '들통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마음속에 가득 찬 초조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하, 이 사람에게도 내면이라는 것이 있구나, 생각할 찰나였다. 그런데 그다음날 동일인물은 자기 혐의를 누군가가 덮어주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는 것이었던가. 그런 다음 법조계 쪽에서는 문제를 제기한 국회의원을 수사하고 재판하고 그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일각에서는 정봉주 전 의원보다 더 강도 높게 비비케이 문제를 거론한 박근혜 의원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비비케이를 설립했습니다'라고 자랑했던 대통령 자신이 허위사실 유포의 본원지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디도스 사건도 그 꼬리는 상당부분 드러났고 검찰 수사에서 실체가 얼마나 드러날지가 관건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이 명백한 선거부정 사건도 관심을 가진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나 언급되는 상황이다.
집권세력 쪽에서는 북한 정세의 급변이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덮어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오해해서는 안 된다. 비비케이, 디도스 등에 대한 논의가 잠정적으로나마 빠른 속도로 가라앉게 되었듯, 북한 정권의 향방을 궁금해하는 시선들도 이제 금방 차분해질 것이다. 한국의 경제와 부패,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관심은 빠른 속도로 되살아날 것이다. 한국의 정치권은 북한의 핵문제 해결과 경제적 연착륙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더불어 한국 사회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곧이어 올 총선과 대선에서 상응하는 점수를 얻을 것이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기사등록 : 2011-12-28 오후 07:32:22 기사수정 : 2011-12-29 오전 10: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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