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7

[경향신문: 최장집칼럼] 서민들 삶의 현장에서 복지를 생각하다

 


[최장집칼럼]서민들 삶의 현장에서 복지를 생각하다

분배와 복지 없는, 성장만을 위한 경제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진부한 느낌이 들 정도다. 오랫동안 성장지상주의가 지배했던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이리도 쉽게 복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그간의 성장일변도 정책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혹은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는 준비 없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과도하게 받아들여 기존의 성장체제를 지속시키려 했던 것의 결과는 참담했다. 시장경쟁은 가열화되었던 데 반해, 그 과정에서 급증할 수밖에 없었던 열패자들을 위한 안전망 공급은 도저히 그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식 통계를 살펴보면, 계층구조의 최저층인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155만명이고 기초생활보장급여를 받지 않지만 최저생계비를 약간 웃도는 차상위, 차차상위 등 저소득 빈곤층 수가 300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빈곤 저소득층을 가리키는 이들의 실제 규모는 대략 550만명에서 8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6.6%이다. 이들 빈곤 저소득층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위해 의지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들에게 가족은 서로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일 뿐이다. 그동안 국가는 재벌과 연합해 경제성장을 앞장서 주도하면서 사회가 양극화되고 공동체적 사회유대와 가족이 해체되는 것을 방치했다. 그런데 오늘날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가 사회적 합의에 가깝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성장일변도 체제의 부정적 결과를 보전해야 할 책무를 국가가 갖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웅변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모든 정당, 정치인들이 공약하고 있는 복지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시행되고 있으며, 복지정책의 대상으로서 실제 복지 수혜자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평가하고 있을까? 내가 찾아간 곳은, 전주시 한 지역이었다. 기반 산업도 없고 시의 재정자립도도 전국에서 가장 낮고, 노인 빈곤율도 높을 뿐 아니라 전체 빈곤율 역시 6.4%로 전국 평균의 두 배나 되는 최고 빈곤율을 갖는 지역이다. 나는 이곳 한 자활센터에서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수급자가 아닌 차상위자, 그리고 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사정은 대개 비슷했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월 70~80만원을 받는데, 복지행정 분류상으로 그보다 좋은 조건으로 판정된 차상위자들에게는 그 혜택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식당일, 청소일 같은 다른 저임금 잡역을 포기해서라도 수급자가 되기를 바랐다. 나이 많은 사람은 기초생활보장비 연령 제한인 65세가 되어 탈수급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과거에는 기초생활수급에서 차상위로 분류된 사람들을 복지혜택의 '사각지대'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수가 수급자에 비해 두 배나 돼, 더 이상 단순히 사각지대라고만 할 수 없는, 복지혜택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집단이 되어 있었다.

경직되고 관료적인 자산소득평가(means-test) 방식에 대해 그들의 불평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급자와 탈수급자 간의 이해관계의 갈등도 보이지 않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리비아에서 설비공사 일을 하다가 귀국했다는 한 사람은 한국의 복지가 중동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사람을 묶어서 사료 주는 식으로 한다"고 관료적 복지행정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자활프로그램에서 꽃집을 하는 중년 여성, 자전거수리 기술, 제빵 기술을 배운 남성들은 설비하고 교육을 받았으면, 실제로 시장으로 나가 자립해서 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비꼬았다. 자전거 기술을 배우며 자활근로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중년 기초생활수급자는, 현재의 급여로 생활비의 80%를 지원한다고 하지만 추가 의료비를 포함해 나머지 20%는 자신들 같은 빈곤층에게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한다. 자신은 신용불량자가 됐고, 돈 때문에 싸우고 이혼도 했다고 한다. 자녀 가운데 한 아이는 공부를 잘해 등록금이 싼 국립 군산대에 입학했지만, 등록금 200만원을 감당할 수 없어 휴학 중이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쳤다고 한다. 센터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사회복지사는 최근까지 가정을 방문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기초생활수급자보다 실제로 생활이 더 어려운 차상위자의 아이들이 주변에 더 많았고, 최근에는 민간지원이 줄어들어 그 아이들을 더 이상 돌보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다고 한다.

한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센터의 도움으로 방문했던 한 재가(독거) 노인의 경우는 노인복지 정책과 행정이 안고 있는 문제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70대 중반인 할머니의 수입원은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생계급여 30만원, 기초노령연금 9만원, 장애수당 3만원이 전부이다. 그런데 최근 할머니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자식이 의무부양자로 인정되면서 주 수입원인 생계급여 심사에서 탈락했다. 결국 한 달 수입은 15만원으로 줄어들었고 당연히 방세, 전기요금도 충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할머니는 복지센터가 가져다주는 쌀과 김치로 끼니를 때우고, 냉기가 스며드는 썰렁한 독방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낡은 텔레비전과 작은 상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 하나로 매일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듯, 최빈곤층에 한정된 '선별적 복지'를 확충하고 이를 저소득 소외계층 전반으로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나아가 교육정책과 접맥되는 방향으로 복지정책의 범위와 방향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 접근만으로 충분할까? 경제성장과 시장효율성의 가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에 대응하는 인간주의적 가치를 정립하지 않고서는 복지국가로의 질적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복지정책과 제도가 성장주의의 잔여 범주로 실현될 때, 복지 수혜에 대한 대가는 사회 낙오자 내지 열패자라는 낙인(stigma)이고, 그로 인해 수혜자는 경제적 능력과 아울러 사회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전주시 덕진구의 지역자활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생활자립에 실패해서 다시 수급자가 된다면 무슨 창피일까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점에서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은 중요하다. 그것은 복지란 사회나 국가가 의당 시민에게 부여해야 할 수혜이므로 시민은 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하는 한편, 수혜자 개인으로 하여금 자아 존중과 긍지, 삶의 목적과 효능을 견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복지정책은 복지혜택을 부여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이 주체이지 권리를 갖는 시민이 중심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직은 '시민 없는 복지'의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가 사회적 시민권이 되는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건 정당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정당은 시민을 대표하고,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인 소외세력의 소리를 대변하는, 시민사회의 핵심 기구이자 자율적 정치조직이기 때문이다. 그 결함이 어떠하든, 지금까지 한국 복지체제의 발전에서 정당이 기여한 것은 거의 없다. 지역의 자활센터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은, 복지정책과 관련해 정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당은 서민들의 생활현실에 뿌리를 내린 적도, 이를 향상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한 적이 없다. 이러한 조건이 지속되는 한 복지가 사회적 시민권의 위상을 갖게 되는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정당과 정치인들이 복지의 중요성을 말하며 그 어떤 도덕적 수사를 동원하고 이상을 소리 높여 외친다한들, 한낱 허구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지역의 복지센터와 복지 수혜자들을 만나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정당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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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11-12-26 21:22:41수정 : 2011-12-26 21: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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