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29

[한겨레 기사돌려보기][세상 읽기] BBK, 디도스… 아직 살아있는 문제들 / 한정숙


[세상 읽기] BBK, 디도스… 아직 살아있는 문제들 / 한정숙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판결은
집권자를 향한 저돌적인 충성 외에
그 근거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한겨레
»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인기없는 정권에게 적당한 정도의 대외적 긴장만큼 고마운 일도 없다.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내부 문제를 덮기에 안성맞춤이고, 운이 좋으면 통치자가 사회통합의 구심체로 떠오를 수도 있다. 산업화로 인한 사회갈등이 심해져 가던 19세기 말~20세기 초반 일부 자본주의 국가 집권자들이 그 해법으로 택한 것이 제국주의 정책이었는데, 이 유형의 제국주의를 사회제국주의라 부른다. 제국주의 정책은 아니지만, 남북한 집권자들도 분단 상태에서 비롯되는 충돌·긴장·돌발사를 자주 활용해 왔다.
이번 북한 최고권력자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권력교체도 한국의 집권세력에게는 호재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이명박 대통령처럼 운 좋은 사람도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12월19일 낮부터 모든 언론보도를 북한 관련 기사가 뒤덮었다. 특히 조문을 둘러싼 논란은 남북한 집권층에서 서로 부추긴다는 느낌을 주기에 딱 알맞았다. 10·26 지방선거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이 디도스 공격을 받은 사건도, 날치기로 통과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4대강 사업의 문제점도, 청년실업 문제도, 한나라당이 신장개업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까지 모두 묻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와중에 정봉주 전 의원이 비비케이(BBK) 문제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 확정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집권자를 향한 저돌적인 충성 외에 판결의 근거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사진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2007년 12월 초 비비케이 의혹의 정점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다음날 검찰이 '혐의 없음'을 발표한 뒤 그가 활짝 웃는 장면이다. 첫째 사진은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당당하고 결연한 표정이 아니라, '들통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마음속에 가득 찬 초조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하, 이 사람에게도 내면이라는 것이 있구나, 생각할 찰나였다. 그런데 그다음날 동일인물은 자기 혐의를 누군가가 덮어주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몰랐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것을 감추는 것이었던가. 그런 다음 법조계 쪽에서는 문제를 제기한 국회의원을 수사하고 재판하고 그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일각에서는 정봉주 전 의원보다 더 강도 높게 비비케이 문제를 거론한 박근혜 의원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비비케이를 설립했습니다'라고 자랑했던 대통령 자신이 허위사실 유포의 본원지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디도스 사건도 그 꼬리는 상당부분 드러났고 검찰 수사에서 실체가 얼마나 드러날지가 관건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이 명백한 선거부정 사건도 관심을 가진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나 언급되는 상황이다.
집권세력 쪽에서는 북한 정세의 급변이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덮어버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오해해서는 안 된다. 비비케이, 디도스 등에 대한 논의가 잠정적으로나마 빠른 속도로 가라앉게 되었듯, 북한 정권의 향방을 궁금해하는 시선들도 이제 금방 차분해질 것이다. 한국의 경제와 부패,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관심은 빠른 속도로 되살아날 것이다. 한국의 정치권은 북한의 핵문제 해결과 경제적 연착륙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더불어 한국 사회 자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곧이어 올 총선과 대선에서 상응하는 점수를 얻을 것이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기사등록 : 2011-12-28 오후 07:32:22 기사수정 : 2011-12-29 오전 10: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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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사돌려보기][시론] 정봉주 유죄판결은 법적 착시현상 / 박경신

[시론] 정봉주 유죄판결은 법적 착시현상 / 박경신
한겨레
»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가가 모든 걸 통제하고 개입할 필요는 없다. 상대성이론은 국가 개입 없이 발견되었고 아이폰은 국가 지원 없이 잘 만들어졌다.

사법부가 모든 말의 진위 여부를 결정할 필요도 없다. 안기부 엑스(X)파일 검사가 실제로 떡값을 받았는지, <조선일보> 사장이 장자연의 성상납을 받았는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등등 어떤 명제들은 과학적으로, 현실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인 '신은 존재하는가?'도 그 진위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천년을 잘 살아왔다.

국가가 국민이 한 말이 허위라고 해서 잡아 가두거나 국가가 독점하는 기타 강제력을 행사하려면 우선 그 말이 허위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이번 정봉주 전 의원의 유죄 판결은 이 당연한 원리를 송두리째 무시한 판결이다. '비비케이(BBK)가 이명박 소유가 아니다'라는 입증이 없는 상황에서 정봉주 의원에게 '네 말이 진실이라고 입증하지 못했으니 유죄'라고 하는 판결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판결이다.

대륙법과 영미법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도 진실인지 입증하지 못한 명제의 책임을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지우는 나라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야훼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 죄로 모두 감옥에 가야 할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입을 다물라'는 것인데 이런 규범 아래서 문명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상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에서는 다행히도 우리 대법원이 정확하게 말했다. "안강민·홍석현·이학수가 법정에 출두해서 '우린 떡값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증언이라도 하지 않는 한 이를 입증하지 못한 책임을 노회찬에게 지울 수 없다"고. 이 대법원 판결의 원리를 완전히 뒤집은 이번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깊게 우리 속살을 도려내야 하는지 보여준 판결이다.

이상훈 대법관은 '비비케이가 이명박 소유이다'라는 명제가 허위인지를 판시하지 않고 정봉주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틀림없이 죄목은 '허위사실 공표'인데 허위인지를 판시하기 전에 정봉주에게 자신이 한 말의 근거가 없다고 유죄를 때렸다.

이렇게 하게 된 이유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형법 307조 1항이 진실인 경우에도 명예훼손의 성립을 인정하기 때문에, 진실이든 허위이든 어차피 유죄이니 기소 죄목에서는 '허위'가 위법성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진위를 판정하기도 전에 말한 사람이 얼마나 근거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따진다. 피고인이 한 말의 진위를 밝힐 생각은 안 하고 '피고인 너 그런 말 할 자격 있느냐'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권력비리는 캘 수가 없다. 권력비리는 침묵과 어둠의 장막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들은 이런 장막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막을 뚫고 간신히 올라오는 단서들은 당연히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서들을 제시할 수조차 없다면 비리의 고발은 불가능하다.


장자연이 남긴 유언장과도 같은 문서, 안기부가 본의 아니게 남긴 엑스파일, 외국 과학자들과 언론이 광우병에 대해서 한 말, 누리꾼들이 황우석의 테라토마 사진을 보고 제기한 의혹들이 바로 그러한 단서들인데, 이 단서들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묻는다고 해서 감옥에 가야 한다면 누가 비리 고발을 하겠는가. 정봉주도 비비케이의 소유주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침묵의 장막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어렵게 어렵게 얻어낸 단서들을 국민들과 공유한 것뿐이다.

지금 할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진실임에도 명예훼손 책임을 지우는 형법 307조 1항을 꼭 폐지해야 한다. 물론 이번 유죄 조항은 선거법 조항이지만, 명예훼손 논리를 대입하였음이 분명하다. 둘째, 사법개혁이다. 법관소환제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법관이든 검사든 국민의 위임 범위 안에서 활동한다는 명제를 확실히 상기시켜줘야 한다. 국민은 누구에게도 국민의 말이 진실임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국민을 처벌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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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11-12-23 오후 07:36:07 기사수정 : 2011-12-23 오후 1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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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8

[한겨레 기사돌려보기]“DJ가 ‘MB가 똑같긴 뭐가 똑같아’ 역정내더라”

"DJ가 'MB가 똑같긴 뭐가 똑같아' 역정내더라"
뉴욕 김 위원장 분향소 찾은 문동환 목사에게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 뜻을 묻다
하니Only 권태호 기자기자블로그
» 문동환 목사. 사진 권태호 특파원
지난 1991년부터 미국 뉴저지주에 거주하고 있는 문동환(90) 목사는 지난 21일(현지시각) 뉴욕의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에 마련된 김정일 국방위원장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문 목사는 조문을 마친 뒤, 북한 대표부 앞에 있던 기자들에게 "21세기에는 국익을 극복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평화를 이룩해야 인류의 평화가 오지 않겠느냐"며 "먼저 한민족이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뜻을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해 26일 문 목사의 자택을 찾았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문 목사는 거실에 만든 작은 책상에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성경과 컴퓨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문 목사는 "서재는 2층에 있지만, 아내가 혼자 있으니 심심하다고 해 거실에 책상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처음 조문 논란과 대북 정책으로 이야기를 꺼내면서 남쪽의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지만, 북한 사회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문 목사는 이후 한국정치, 북한 사회, 자본주의, 철학, 기독교 신앙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음은 문 목사와의 일문일답이다.

"아마 북한이 이명박 정부와는 더이상 상대하려 하지 않고, 1년 뒤 차기 정부와 새롭게 판을 짜고 싶어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 이전에는 미국과 관계개선만 하려 할 것이고. 참 안타까운 일이다."

Ⅰ. 대북 정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하셨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6·15 남북공동선언문에 합의한 당사자들이고, 김정일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에게 조문단을 보냈듯이, 우리도 당연히 조문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는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6·15 공동위원회는 양쪽을 다 존경하는 것이다. (한쪽이 숨졌으니) 조문을 가는 게 응당 당연하다. 미국에 있으니 북한 대사관에 갈 수 있으니, 간 것이다."

 

-94년 정도는 아니지만 남에서는 또다시 조문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좀더 큰 틀에서 과감하게 결정을 못 내리는 게 아쉽다. 하지만 (진보단체가) 김정일 제단을 만들고 그러는 것은 뜻은 알겠지만, 그게 남북화해에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조문을 하도록 평양에 가도록 해달라' 탄원서를 내는 정도는 몰라도. 정부가 이만큼이라도 한 것도 상당한 변화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돌파구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는 것 같다.

"이 대통령이 당선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았을 때, 김 전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평화적으로 운영할 것을 요청하자, 이 대통령은 '저도 (김 전 대통령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김 전 대통령이 내게 '나한테 그렇게 말하더니, 똑같기는 뭐가 똑같아'라고 하며 역정을 내더라.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에게 '북한 지하에 보화(자원)가 많습니다. 이걸 남쪽과 나눠야지, 중국에 줘서 되겠습니까?'라고 김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잘못으로 북한이 중국 쪽에 점점 가까워지며, 김 위원장과 김 전 대통령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북한은 밑바닥에 민족주의가 깔려있고, 애초 국가의 건국 과정에서 소련이 배경이 됐다. 중국과 친밀감을 갖는 것은 현재 자신을 도울 곳이 중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표부에 조문 갔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했나?

"당시, 북한 참사관만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 그 참사관이 '우리가 한민족인데, 우리끼리 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끼리 합니까? 우리도 미국과 먼저할 생각은 없다. 서로 같이 사는 길을 찾아야죠'라고 말하더다. 그래서 내가 '한 나라 안에서도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고 말했다. 이는 이북의 권위주의를 지적한 것인데, 그 참사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향후 대북 전망을 어떻게 보나?

"아마 북한이 이명박 정부와는 더이상 상대하려 하지 않고, 1년 뒤 차기 정부와 새롭게 판을 짜고 싶어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 이전에는 미국과 관계개선만 하려 할 것이고. 참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은 한-미 공조를 중시 여겨 한국 정부를 어렵게 하진 않을 텐데….

"미국이 북한에 대해 성급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또 이명박 정부를 제치고 나아갈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유무역협정(FTA) 조약 같을 것을 보면 이를 통해 한국 정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등 현상황을 역이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통령이 당선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았을 때, 김 전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평화적으로 운영할 것을 요청하자, 이 대통령은 '저도 똑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김 전 대통령이 내게 '나한테 그렇게 말하더니, 똑같기는 뭐가 똑같아'라고 하며 역정을 내더라."

-그럼 장기적인 미국의 대북 정책 방향은?

"남쪽이 바뀌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도 바뀐다고 생각한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의 미 정부 당국자와 대화를 나눠보니, '우리'(진보 진영)와 생각이 똑같았다. 북한과 관계개선하려 했다. 마음을 썼다. 그런데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서 돌아선 것 같다. '북한을 믿을 수가 없다'며. 이북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미국을) 당황하게 해서, 빨리 일하게 하려 했는데, 최악의 악수를 뒀다. 그 이후로 미국은 적극적으로 대북정책에 나서려는 움직임이 모두 스톱됐다. 또 중동 문제에 사로잡혔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북한의 핵이 상당 수준까지 발달한 것을 보면서 멈추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이후 북-미 회담, 6자회담을 서두르고 있다. 핵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게 목적인 것 같다."

 

»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주자였던 2007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한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미 정부도 실제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폐기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인정해주면,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그때까지는 (미국과) 대화할 때 일종의 무기로 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도 미국을 잘 믿지 못하니까, 쉽게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도 이를 잘 안다. 그래서 내심으로는 가장 걱정하는 북핵 기술이 바깥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 더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Ⅱ. 국내 정치

-이명박 정부를 평가하면?

"이 대통령은 극보수에 사로잡혔다. 여당이 갈라져 있고, 여당으로부터도 동조를 못 얻으면서 극보수로만 갔다. 잘못이다.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인데, 장사도 제대로 못했다. 애초 이 대통령은 보수·진보 등 이념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촛불' 이후 보수로 가버린 게 아쉽다.

이 대통령 심정도 답답할 것이다. 혹평을 받고 있으니. 애초에 장사꾼에 얼렁뚱땅하는 엠비(MB)에 사람들이 기대를 한 게 잘못이다. 철학이 없는 사람이다. 기회마다 장삿속으로 하는 사람이다. 서울시장 당시 한 청계천을 보라. 표피만 한 것 아니냐? 눈으로 현혹시키고, 그 다음에 운하 이야기 하고. (이 대통령 당선 직후) 서울에 갔더니, 택시 기사들도 '이제는 우리도 잘살 겁니다'라고 말하더라.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됐나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 4년 동안) 고생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안철수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안철수씨가 지혜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지혜가 있어야 되고, 팀을 만들어야 된다. 정치를 한다는 건 희생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꼭 해본 사람이 잘하는 건 아니다. 역시 정치 경험이 없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직을 성공적으로 잘 해나가면, 안철수 원장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과 힘을 모아서 나와야지, 혼자 개인으로 나와선 안 될 것이다. (조카인) (문)성근이도 세력을 만들고 있지만, 다 함께 해야 할 것이다."

 

-문성근씨가 무슨 말씀을 하던가?

"'저도 결단했습니다'라고 말하더라. 노무현 정부 당시 문화부 장관 제의도 거절했던 사람이다. 신중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잘 판단했을 것이다. 정치 해본 일은 없지만, 외곽에서 계속 활동해왔다. 뜻이 좋은 것은 내가 잘 알고, 생각 많이 하고, 들어섰기에 뭔가 공헌하리라 기대한다."

Ⅲ. 자본주의 폐해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경제가 살아나도, 그것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미국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비슷한 상황이다. 빈익빈 부익부 사회가 고착화되는 것 같다.

"나는 자본주의 상업문화에 실망한 사람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사회이고, 경쟁사회는 '힘의 철학'이 작동한다. 눈이 멀어버려 빈부격차가 커질 수 밖에 없다. 미국도 1%가 전체 자산의 반을 갖고 있다. 그래도 (1%들은) 쉬지 않고 계속 자기 배만 채운다. 미쳐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당한 시험이 3가지인데,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그대로 적용된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 이는 많이 생산해야 된다는 것을 뜻한다. '나한테 절하라, 영화를 주리라', 이는 명예욕을 뜻한다, '성문에서 뛰어내려보라', 이는 종교를 이용하라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이를 다 거부하셨고, 대신 나누고, 섬기고, 종교를 이용하지 말라는 교훈을 몸소 보여주셨다.

자본주의에는 근본적인 소망이 없다고 본다. 산업문화의 기본 얼은 더 많이 갖고, 힘을 필요로 한다. 모두 다 서울대를 가려는 것도 힘을 갖기 위해서 아닌가? 교회도 '욕심'이 대형 교회를 세우는 쪽으로 나아간다. 큰 교회 목사는 제왕처럼 되지 않나. 인간의 속성이 그렇다."

"안철수씨가 지혜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지혜가 있어야 되고, 팀을 만들어야 된다. 정치는 꼭 해본 사람이 잘하는 건 아니다. 역시 정치 경험이 없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직을 성공적으로 잘 해나가면, 안철수 원장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

 

-말씀이 어렵다.

"성경의 가르침이 '네 이웃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 네 이웃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각자위심'(각자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제일 큰 문제다. 세상의 악이 여기에서 생긴다. 예수님이 말하는 '회개'도 그런 일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종교는 대개 창시자는 진리를 깨닫는다. 이후 제도와 교리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나중에 그 제도가 우상이 돼버린다. 기독교도 나중에 (기독교의 진리보다) '기독교'가 중요해졌다. 사람이 만든 것은 진리가 아니다.

마음의 변화, 깨달음, 생명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제도를 가지고 지도자들이 이용하는 것, 그게 자본주의적이 된다."

-미국은 어떻나?

"나는 미국에 소망이 없다고 보는 사람이다. 미 국회의원들도 자본가의 앞잡이다. 워싱턴 정치도 엉망이다. 대안은 없다. 부자 세금을 탕감해야 기업이 잘 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대량생산, 대량소모가 있어야 굴러간다. 그런데 미국에서 생산하지 않고, 인건비가 싼 제3세계에서 생산해 돈은 미국 은행으로 들어와 가진 사람들의 돈은 더 늘지만, 없는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고 돈도 못 버는 상황이다. (미국에서) 옛날에는 남편만 일했는데, 이제는 둘 다 일해야 살 수 있다. 자본주의의 징벌이다.

세계은행 총재가 1930년대로 돌아간다고 한다. 당시 실직자가 전체의 25%였다. 그래도 그때는 도시 근교에서 땅을 일궈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땅도 없다. 인류의 앞날이 어둡다."

 

-그럼 자본주의에 사회주의를 가미해야 한다는 건가?

"사회주의도 마음이 문제다. 칼 마르크스는 시민사회에서 공산주의가 온다고 봤다. 시민이 깨달아 주체가 되어야 공산주의가 됐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봉건주의 때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니 그 과정을 채우기 위해 시민사회가 제대로 형성될 때까지 지식인 위주의 공산당 독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각자위심'이 일어나 이것이 권위주의로 변질했다. 그래서 망했다.

북한도 이 과정을 회개한 건 아니다. 평양에 가봤더니, 큰 건물을 많이 지어놨더라. 그런 건물을 왜 만드는가? 김일성이 자기 영광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인민들은 비참하게 있는데, 김일성 동상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북한이) 동족으로서 잘살기 바라지만, 그 지도자에 대해선 비판의 자세를 갖고 있다."

 

-그럼 북유럽 사회가 대안인가?

"북유럽은 기독교가 올바로 돼 나누면서 살아간다. 수입의 40%가 세금이다. 대신 기본생활은 정부가 다 해준다. 고르바초프가 혁명을 하면서 '스웨덴처럼 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웨덴도 각자위심이 완화된 건 아니다. 공황이 닥치니 보수주의가 다시 일어난다.

각자위심이 국제사회에선 '국익'이라는 말로 나온다. 미-중 갈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중동 갈등도 국익이라는 말에서 나온다. 자기 중심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는 독재에 민중들이 항거했지만, 다시 개방된 다음엔 거부들이 경제를 장악했다. 중국에서도 최고부자가 등소평의 딸이라고 하지 않나? 각자위심이 무섭다."

 

-그건 인간의 본성 아닌가? 치유할 방법이 있나?

"'각',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이 밑바닥에서 모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눔, 섬김이 가능하다. '민중'이란 항거해서 자기 권리를 찾는 사람이라는 건데, 거기에는 '나도 (가진 자처럼)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새 것을 찾지 못하고, '나도' 하는 것 때문에 안 된다.

그래서 (예수와 같은) '떠돌이'가 필요하다. '악'을 보고, 완전히 '새 것'을 창출하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석가도 '욕심'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를 창출하는데까지 나아가진 못했다. 예수님은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고,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노예로 있을 때, 먼저 '각'한 사람이 모세다. 노예의 삶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각'했다. 그래서 애굽 군사를 때려죽였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당해 미디암 광야로 갔다. 40년을 고민하며 찾았다. 출애굽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악을 아파하며 기다렷다. 돌아서야 '각'이 생긴다. 모세 혼자 '각'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각'할 때, 출애굽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역사를 운영하는 원칙이다. 한국도 집단적으로 '각'을 해야 한다.

군사독재 거부로는 안 된다. 인간본성의 각자위심이 문제이기 때문에 거기서 끝이다Ⅳ. 새 공동체로 가야 하는데, 또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년 5월에 이런 내용을 담은 <바벨탑과 탈출 공동체>라는 책을 펴낼 예정이다. '바벨탑'은 권위를 말한다. 일반인들도 다들 자기의 '바벨탑'을 쌓고 거기에 집착한다."

 

"세계은행 총재가 1930년대로 돌아간다고 한다. 당시 실직자가 전체의 25%였다. 그래도 그때는 도시 근교에서 땅을 일궈 먹고 사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땅도 없다. 인류의 앞날이 어둡다."

Ⅳ. 근황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계속 공부한다. 예전에 민중신학을 교육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려 했는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면서 중단됐다. 그때 '은퇴한 뒤에 써야지' 하고 한 것을 지금 하고 있다. 성서를 근본적으로 공부했더니, 민중신학에도 약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억눌린 반향에서 나온 생각이 민중신학이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인데, 존명에 허덕이는데 어떻게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나? 고난을 당하면서 악을 보고 새 것을 찾아야 하는데, 자기가 그 '악'이 되려 해선 안 된다.

예수님의 삶을 교육학적 각도에서 분석해 보려 한다. 능력이 있는 한 계속 진리를 탐구해나갈 것이다. 동양철학도 공부하고 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만의 하나님일 리가 없다. 온 인류의 하나님이다. 유대, 한국, 각 민족대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다. 그 지역문화에 따라 형태가 생기고, 종교형태가 그 제도를 절대화했으므로, 그 원천을 가보면 서로 통한다." 

-건강은 어떤가?

"나이가 드니 다리가 약해지고, 척추가 주저앉는다. 한 달전 쯤 심장 수술을 받았다. 혈맥을 뚫어 혈관을 벌여주는 수술이다. 그 이후로 피가 잘 돈다.(혈액순환이 잘 된다) 얼마쯤 또 괜찮겠지."

-하루 일과는?

"아침 먹고, 한국신문을 컴퓨터로 보고, 운동은 1주일에 3번 병원에 가서 한다. 날 좋으면 공원 산책도 한다. 그 외에는 이렇게 앉아서 공부하고 집필한다. 4월쯤에 잠시 귀국할 예정이다."

블룸필드(뉴저지주)/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기사등록 : 2011-12-27 오후 04:23:28 기사수정 : 2011-12-28 오전 1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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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7

[경향신문: 최장집칼럼] 서민들 삶의 현장에서 복지를 생각하다

 


[최장집칼럼]서민들 삶의 현장에서 복지를 생각하다

분배와 복지 없는, 성장만을 위한 경제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진부한 느낌이 들 정도다. 오랫동안 성장지상주의가 지배했던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이리도 쉽게 복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그간의 성장일변도 정책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상황에서 혹은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는 준비 없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과도하게 받아들여 기존의 성장체제를 지속시키려 했던 것의 결과는 참담했다. 시장경쟁은 가열화되었던 데 반해, 그 과정에서 급증할 수밖에 없었던 열패자들을 위한 안전망 공급은 도저히 그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식 통계를 살펴보면, 계층구조의 최저층인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155만명이고 기초생활보장급여를 받지 않지만 최저생계비를 약간 웃도는 차상위, 차차상위 등 저소득 빈곤층 수가 300만명에 이른다. 그러나 빈곤 저소득층을 가리키는 이들의 실제 규모는 대략 550만명에서 8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6.6%이다. 이들 빈곤 저소득층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삶을 위해 의지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들에게 가족은 서로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일 뿐이다. 그동안 국가는 재벌과 연합해 경제성장을 앞장서 주도하면서 사회가 양극화되고 공동체적 사회유대와 가족이 해체되는 것을 방치했다. 그런데 오늘날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가 사회적 합의에 가깝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성장일변도 체제의 부정적 결과를 보전해야 할 책무를 국가가 갖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웅변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모든 정당, 정치인들이 공약하고 있는 복지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시행되고 있으며, 복지정책의 대상으로서 실제 복지 수혜자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평가하고 있을까? 내가 찾아간 곳은, 전주시 한 지역이었다. 기반 산업도 없고 시의 재정자립도도 전국에서 가장 낮고, 노인 빈곤율도 높을 뿐 아니라 전체 빈곤율 역시 6.4%로 전국 평균의 두 배나 되는 최고 빈곤율을 갖는 지역이다. 나는 이곳 한 자활센터에서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수급자가 아닌 차상위자, 그리고 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사정은 대개 비슷했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월 70~80만원을 받는데, 복지행정 분류상으로 그보다 좋은 조건으로 판정된 차상위자들에게는 그 혜택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식당일, 청소일 같은 다른 저임금 잡역을 포기해서라도 수급자가 되기를 바랐다. 나이 많은 사람은 기초생활보장비 연령 제한인 65세가 되어 탈수급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과거에는 기초생활수급에서 차상위로 분류된 사람들을 복지혜택의 '사각지대'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수가 수급자에 비해 두 배나 돼, 더 이상 단순히 사각지대라고만 할 수 없는, 복지혜택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집단이 되어 있었다.

경직되고 관료적인 자산소득평가(means-test) 방식에 대해 그들의 불평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급자와 탈수급자 간의 이해관계의 갈등도 보이지 않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리비아에서 설비공사 일을 하다가 귀국했다는 한 사람은 한국의 복지가 중동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사람을 묶어서 사료 주는 식으로 한다"고 관료적 복지행정체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자활프로그램에서 꽃집을 하는 중년 여성, 자전거수리 기술, 제빵 기술을 배운 남성들은 설비하고 교육을 받았으면, 실제로 시장으로 나가 자립해서 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비꼬았다. 자전거 기술을 배우며 자활근로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중년 기초생활수급자는, 현재의 급여로 생활비의 80%를 지원한다고 하지만 추가 의료비를 포함해 나머지 20%는 자신들 같은 빈곤층에게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한다. 자신은 신용불량자가 됐고, 돈 때문에 싸우고 이혼도 했다고 한다. 자녀 가운데 한 아이는 공부를 잘해 등록금이 싼 국립 군산대에 입학했지만, 등록금 200만원을 감당할 수 없어 휴학 중이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오토바이를 타다가 다쳤다고 한다. 센터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사회복지사는 최근까지 가정을 방문해 저소득층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기초생활수급자보다 실제로 생활이 더 어려운 차상위자의 아이들이 주변에 더 많았고, 최근에는 민간지원이 줄어들어 그 아이들을 더 이상 돌보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다고 한다.

한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센터의 도움으로 방문했던 한 재가(독거) 노인의 경우는 노인복지 정책과 행정이 안고 있는 문제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70대 중반인 할머니의 수입원은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생계급여 30만원, 기초노령연금 9만원, 장애수당 3만원이 전부이다. 그런데 최근 할머니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자식이 의무부양자로 인정되면서 주 수입원인 생계급여 심사에서 탈락했다. 결국 한 달 수입은 15만원으로 줄어들었고 당연히 방세, 전기요금도 충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할머니는 복지센터가 가져다주는 쌀과 김치로 끼니를 때우고, 냉기가 스며드는 썰렁한 독방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낡은 텔레비전과 작은 상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 하나로 매일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듯, 최빈곤층에 한정된 '선별적 복지'를 확충하고 이를 저소득 소외계층 전반으로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나아가 교육정책과 접맥되는 방향으로 복지정책의 범위와 방향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제도적 접근만으로 충분할까? 경제성장과 시장효율성의 가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에 대응하는 인간주의적 가치를 정립하지 않고서는 복지국가로의 질적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복지정책과 제도가 성장주의의 잔여 범주로 실현될 때, 복지 수혜에 대한 대가는 사회 낙오자 내지 열패자라는 낙인(stigma)이고, 그로 인해 수혜자는 경제적 능력과 아울러 사회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전주시 덕진구의 지역자활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생활자립에 실패해서 다시 수급자가 된다면 무슨 창피일까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점에서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은 중요하다. 그것은 복지란 사회나 국가가 의당 시민에게 부여해야 할 수혜이므로 시민은 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하는 한편, 수혜자 개인으로 하여금 자아 존중과 긍지, 삶의 목적과 효능을 견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복지정책은 복지혜택을 부여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이 주체이지 권리를 갖는 시민이 중심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아직은 '시민 없는 복지'의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복지가 사회적 시민권이 되는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건 정당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정당은 시민을 대표하고,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인 소외세력의 소리를 대변하는, 시민사회의 핵심 기구이자 자율적 정치조직이기 때문이다. 그 결함이 어떠하든, 지금까지 한국 복지체제의 발전에서 정당이 기여한 것은 거의 없다. 지역의 자활센터에서 만났던 여러 사람들은, 복지정책과 관련해 정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당은 서민들의 생활현실에 뿌리를 내린 적도, 이를 향상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한 적이 없다. 이러한 조건이 지속되는 한 복지가 사회적 시민권의 위상을 갖게 되는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정당과 정치인들이 복지의 중요성을 말하며 그 어떤 도덕적 수사를 동원하고 이상을 소리 높여 외친다한들, 한낱 허구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지역의 복지센터와 복지 수혜자들을 만나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정당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입력 : 2011-12-26 21:22:41수정 : 2011-12-26 21: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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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4

[PRESSian] 북한 바로알기, 한반도 분단의 현실과 통일에 대한 서적들

기사입력 2011-12-23 오후 6:47:00

2012년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 '태양절', 휴전선 근처의 북한군 일부가 총부리를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돌렸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북한군 내 반대파가 쿠데타를 기도한 것이다. 평양 근처에서 국지적인 교전이 있었고, 이 소식은 곧바로 전 세계로 타전됐다.

교전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미국은 곧바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체제의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특히 북한의 대량 살상 무기와 핵무기가 한국, 일본, 타이완 등 우방을 위협하는 일을 좌시하지 않겠다." 일본 요코스카의 미군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동해와 남해 인근의 공해상으로 이동했다.

이런 미국의 움직임에 중국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중국은 김정은을 포함한 북한 권력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으며, 북한 내 소요 사태를 빌미로 미국을 비롯한 제3국이 내정 간섭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 중국 역시 2011년 시험 운항을 했던 자신의 항공모함을 황해로 전진 배치했다.

2012년 4월 16일. 정작 난리가 난 곳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었다. 4월 11일 총선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던 남한은 북쪽에서 들려온 총성에 패닉에 빠졌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곳은 주식 시장이었다. 연초 1800대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던 주가 지수는 곧바로 곤두박질쳤다. 외국인들의 '팔자' 러시로, 정부의 외환 시장 방어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가파르게 올랐다.

2012년 4월 18일. 북한의 평양 주변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여전히 계속되면서 한반도의 긴장은 더욱더 고조되었다. 중국군이 김정은의 승인 하에 압록강을 건너리라는 군의 발표가 있었다. 미군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미국은 김정일 사후 북한에서 내란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만든 '작전 계획 5029'를 만지작거렸다. 그에 따라 미군과 한국군 일부가 북한으로 넘어가리라는 전망이 나왔다. 정부는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2012년 4월 19일. 이날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한국 거주 미국인의 철수를 준비 중이라고 보도했다. 사재기로 대형 할인점의 물건이 동이 났다. 특히 서울 강남의 동요가 심했다. 인천국제공항은 한국을 탈출하는 외국인, 내국인이 섞여서 북새통을 이뤘다. 대학생과 시민 몇몇은 미국과 한국의 개입은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며 '인간 방패'를 자처하고 판문점으로 가는 길목에서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2012년 4월 20일. 검은 금요일이었다. 100만 원이 넘던 삼성전자 주가가 40만 원대로 주저앉았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주가 지수는 이미 500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금값이 폭등했고, 기름을 비축하려는 인파로 주유소가 장사진을 이뤘다. 이 와중에 일부 기업이 자산을 해외 이전한다는 소문이 증권가를 중심으로 나돌았다.

2012년 4월 23일. 평양뿐만 아니라 압록강 인근에서도 교전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국군의 개입에 반대하는 북한군의 내부 소행이라는 주장, 미국이 사주한 반(反 )김정은 파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엇갈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하 벙커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남쪽에 미칠 여파를 최소화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생업에 종사하라."

2012년 4월 24일. 청와대 고위 인사를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의 가족 일부가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진이 트위터로 공개되었다. 정부는 '괴소문'을 차단한다며 주요 포털 사이트를 비롯한 인터넷 서비스를 무기한 중단했다. 인터넷 신문이 서비스를 중단한 틈에 몇몇 보수 언론은 "평양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이 끌어내려졌다"고 보도했다. 물론 오보였다.

황사보다 더 짙은 공포가 한반도를 뒤덮었다. 잔인한 4월이었다.


ⓒ프레시안(손문상)

2011년 12월 19일 정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 닷새가 지났다. 지난 닷새 동안 한국의 주요 언론은 일제히 '북한 붕괴' 가능성을 점검했다. 1990년대 중반(김일성 주석 사후)에 한반도를 떠돌던 '북한 붕괴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새롭게 등장한 '김정은 체제'가 군부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앞에서 거친 상상력으로 써본 가상 시나리오는 진짜 북한 붕괴가 일어난다면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본 것이다. 이 가상 시나리오는 북한 붕괴를 점치는 이들이 간과하는 중요한 점을 강조한다. 북한에 문제가 생기면 남한이 곧바로 직격탄을 맞으리라는 사실이다. 시나리오가 보여주는 가상 상황이 '오버'라고? 항상 현실은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미군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백날 폭격해도 미국 시민의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북한에서 총탄이 오가는 순간 한국 시민의 일상생활은 풍비박산이 난다. 왜냐하면, 휴전선은 서울에서 고작 한 시간, 평양은 고작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books'가 2011년 송년호의 귀중한 지면을 '북한 제대로 알기'를 위해서 할애한 것도 이런 중대한 착각을 교정하기 위해서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복지와 시장의 갈등도, 생태와 개발의 긴장도 모두 한국이라는 공동체-사회가 온전할 때의 얘기다. '전쟁의 추억'을 다시 불러와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가?

다 같이 죽자고? 아니, 혹시 전쟁이 나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미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첫 번째 질문 : 북한은 과연 붕괴할 것인가?{#8974834502#}
▲ <정세현의 정세 토크>(정세현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대형 서점의 북한 서가에 가면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책들이 가득하다. 그나마 대부분은 냉전 시기에 쓰인 '김일성은 뿔났다' 수준이 대부분이다. 이런 마당에 과연 일부 대학은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은 북한학과를 아예 없애려는 모양이다. 북한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 한반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들썩이는데 북한 연구의 토대를 부수겠다는 건가?

그런 먼지 뒤집어쓴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은 남북 교류의 산 증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원광대학교 총장)이 쓴 <정세현의 정세 토크>다. 2008년 7월 15일 첫 회를 시작으로 총 60차례 진행된 <프레시안>의 인기 연재 '정세현의 정세 토크'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제훈 <한겨레21> 편집장의 평을 들어보자.

"외교, 안보, 통일 분야 담당 기자들 사이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비판하는 하나의 가이드라인' 구실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회자된다. (…) 술자리 토론에서 의견이 다른 지인과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이 책은 전문 서적 열 권 이상을 읽은 뒤에 느낄 지적 희열과 개안을 독자들에게 안겨줄 것이라 믿는다."(☞관련 기사 : 칠흑같은 MB 시대, '정세의 등대'를 켜라!)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언론에서 김정은 체제의 불안정성을 얘기하자마자 제일 먼저 이 책을 집어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선 정세현 전 장관이 북한 붕괴를 놓고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전 장관은 이렇게 간명하게 북한 붕괴를 전망을 일축한다.

"3대 후계자로 알려진 3남 김정은은 나이가 여러 경험이 부족하고 능력이 별로 없을 테니까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역사에서만 봐도 그런 경우가 많았어요. 젊은 세자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에 선왕을 승계하면 중신들이 그 젊은 임금을 잘 보필합니다. 그렇게 조선조 500년을 끌고 왔어요.

김정일 위원장도 조선 시대 중신에 해당하는 원로들이 보필해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겁니다. (…) 북한 체제가 자유민주주의적 선거로 정권의 정통성이 인정되는 체제라면 김정은 체제는 오래 못 갈 겁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 정권의 정통성은 선거가 아니라 혈통으로 결정되고 있어요. 북한은 사실상 왕조라고 봐야 합니다.

왕조는 혈통으로 정통성을 규정하는 거고, 중신들이 버텨주면 그냥 가는 겁니다. 이걸 무시하고 후계자가 나이가 어려서 붕괴할 거라고 말하는 건 너무 섣부릅니다. 북한을 비판할 때는 독재 국가니 왕조니 비판하면서, 전망할 때는 민주주의 잣대를 들이미는 건 모순입니다. (…) 북한 체제의 장래를 전망하려면 체제 위협 요인만 따질 게 아니라 체제 지탱 요인도 같이 분석하고 비교해야 합니다." (<정세현의 정세 토크>, 65~68쪽)
이런 분석에 미국의 한국 현대사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 노스웨스턴 대학 교수도 공감을 표시한다. 커밍스 교수는 20일 미국 군사 전문지 <디펜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원로 지도층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다시 김정은 후계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이끌어왔다"며 "이들이 김정일과 김정은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 "북한 원로 지도층이 김정은 체제 전환 이끌 것")두 번째 질문 : 북한은 몰상식의 '깡패 국가'인가?"나는 김정일을 증오한다. 김정일은 피그미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8991274110#}
▲ <김정일 코드>(부르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따뜻한손 펴냄). ⓒ따뜻한손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북한에 대한 한국 및 서방 언론의 태도를 한마디로 규정하면 '조롱'이다. 김정일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북한 여성의 태도를 보여주면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앵커의 멘트가 뒤따른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당시의 대한민국은 어땠나? 그 때도 독재자의 죽음에 거리 곳곳에서 오열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북한은 혼란스러운 나라다. 그러나 그 나라도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나름의 논리를 가진 나라다. 마치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500년이나 지탱되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인 조선 왕조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운영되었듯이 말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김정일 코드>(따뜻한손 펴냄)는 북한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하는 책이다.

커밍스는 이 책에서 "북한이 일체의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 강압적 국내 정치"를 가지게 된 책임의 상당 부분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미국의 "무서운 파괴"에서 찾는다. 커밍스는 "전쟁이 잠잠해진 1951년 봄 이후에도 미국은 2년간 북한에 맹공을 퍼부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가 침묵하는 이 폭격으로 300만 명의 북한 주민이 희생당했다.

커밍스 교수는 이 책에서 북한 체제를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북한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북한에는 정치범들이 있는가? 물론이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최소한 10만 명이나 된다. 강제노동수용소가 있는가? 심지어 최고 간부라고 할지라도 통치자의 의지를 거스르면 가족들과 함께 격리된 지역에서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릴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 체제가 인간의 자유를 향상시킬 것인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조선 민족을 위한 자유"처럼-자유라는 말이 외국 침략자에 대한 독립적인 입장을 의미하기도 하는 한국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신랄한 판단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민족적 자유 독립은 예수가 탄생한 무렵부터 같은 장소에서 통합과 통일성을 유지해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우선적인 덕목이다.

(…) 이 나라는 처음 40년은 식민 통치로, 그 다음 60년은 민족 분단과 전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불안정한 국가다. (…) 때때로 북한에서는 죽음의 그림자와 악에 근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구세대들의 괴로움에 시달린 듯한 얼굴에서도 이런 감정이 스며 나온다.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첫째는 명치끝의 통증이다. 나는 그들이 옳다는 것과, 지독한 폭력이 압도했던 20세기에서도 가장 처참한 전쟁으로 인해 겪은 고통을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국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더 두려운 느낌으로 미국인들 대부분이 1950년대 초 그들의 이름으로 자행했던 전쟁의 참극을 알지 못하고,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정일 코드>, 251~253쪽)
그리고 커밍스는 요덕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가족과 함께 10년간 갇혀 있었던 강철환(현재 <조선일보> 기자) 씨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되묻는다. 미국은 몰상식의 '깡패 국가'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운가?

"(강 씨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10년간 수용된 전과가 평양 거주나 대학 입학 그리고 엘리트 지위로 진입하는 데 반드시 장애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반면에 미국은 감옥에 흑인으로 가득 찬, 강제노동수용소를 가지고 있다. (…) 그곳에는 모든 흑인 청년들의 25퍼센트 이상이 감금돼 있다. 이것이 경찰국가인 북한의 핑계거리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을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미국인들이 먼저 그들의 내부 도시가 가진 병폐에 대해 무엇인가를 시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김정일 코드>, 142~143쪽)
세 번째 질문, 북한은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가?{#8990106885#}
▲ <냉전의 추억>(김연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한국의 언론은 끊임없이 되묻는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우문(愚問)이다. 왜냐하면, 북한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북한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앞의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김정은 체제'와 공존하기 위해서 한국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김연철 인제대학교 교수의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 펴냄)은 60년의 냉전 기간 동안 "선을 넘어 길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쟁의 공포'가 짓누른 60년간의 역사를 수십 개의 일화를 통해서 살펴보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닫는 것은 (남과 북을 막론하고) 그 공포를 통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실체다.

예를 들어서, 1994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7월 8일)하기 직전 무슨 있었는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 6월을 이렇게 회고했다.

"클린턴 대통령하고 그 때 대판 싸웠습니다. 그때 내가 싸우지 않았다면 아마 '남북 전쟁'이 일어났을 거예요."한국도 모르게 미국이 전쟁을 검토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연철 교수에 따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은 거짓말이다."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 핵심 당사자 세 명이 쓴 책을 보면, 김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반대로 증언한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시종일관 밀어붙인 것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고, 한국은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있었다."북한과의 전쟁 공포로 '사재기 열풍'을 불러온 1994년 여름의 난리는 김영삼 정부가 만든 것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6월 6일 "북한이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다면 자멸과 파멸의 길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청와대는 북핵 보도를 늘려 달라는 부탁을 방송사에 했고, 6월 9일부터 방송은 전쟁 위기, 북핵 문제를 집중 보도했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이 난리는 일단락이 되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멈추지 않았다.

"카터의 방북이 결정되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카터의 방북은 실수'라고 비난했다. (…) 김영삼 정부는 협상의 길목을 차단하면서, 북핵 문제를 위기의 길로 몰아갔다. 성숙한 국민 의식을 안보 불감증으로 몰아세웠으며, 행정망을 통해 사재기를 결과적으로 부추겼다. (…) 강남 부유층이 집중적으로 보여 준 사재기 열풍은 '만들어진 공포'였다." (<냉전의 추억>, 149쪽)그나마 이렇게 '만들어진 공포'로 전쟁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2000년 남북 정상 회담과 같은 평화를 향한 여정으로 반전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평화 세력'의 노력이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피스메이커>는 책 제목대로 '피스메이커'의 숨은 노력을 생생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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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스메이커>(임동원 지음, 중앙북스 펴냄). ⓒ중앙북스
임동원 전 장관은 <피스메이커>에서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이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히 전한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핵심은 1990년부터 10년간의 남북 교류를 다룬 뒷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으로서 27년간 '피스키퍼'로 일하던 임 전 장관이 '피스메이커'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세상이 변했습니다. (…) (1960~70년대) 한국은 자유 진영의 첨단 기지로서 공산 침략에 대처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국제 냉전은 끝났습니다. (…) 2차 세계 대전 후에 분단되었던 나라들은 모두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반공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에서도 냉전을 종식시키고 분단을 극복하여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모든 사상과 정책은 그 시대의 아들입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낡은 시대의 사상과 생각을 계속 고집한다면 낙오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 둘째, 이제 북한의 변화는 불가피합니다. 지금은 세계사의 대전환기입니다. (…) 북한의 변화를 슬기롭게 유도하여 안보 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고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는 '적극적 평화'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싸우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는 부전승전략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 가지 이유, 두 가지 상황 인식에 따라 이제 저는 평화를 지키는 소극적인 피스키퍼의 위상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피스메이커로서의 소명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피스메이커>, 164~166쪽)
"공산주의 비판과 대공전략론을 강의하고, 자주국방을 외치며 군사력 증강 계획을 주도하시던 강경한 반공 보수주의자가 왜 그렇게 변하셨습니까?" 재향군인회가 주최한 강연에서 적잖이 실망스럽다는 투로 질문을 던졌던 한 청중에게 임동원 전 장관이 한 답변이다. 이렇게 '피스메이커'가 만들어졌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쪽이 변해야 북쪽도 변한다.

마지막 질문, 한반도에 희망이 있는가?{#8936485652#}
▲ <북조선 연구>(서동만저작집간행위원회 엮음, 창비 펴냄). ⓒ창비
싫든 좋든 남쪽과 북쪽은 운명 공동체다. 남쪽에서 문제가 생기면 북쪽에서 눈물이 흐르고, 북쪽에서 문제가 생기면 남쪽에 불똥이 튄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둔다면, 남쪽도 북쪽도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 일찍이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를 '분단 체제'라고 명명했고, 2009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서동만 전 상지대학교 교수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에서 평화, 복지, 경제의 새로운 도약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으며, 체제의 성격과 발전 수준이 다른 북조선의 경우도 남북이 함께 해야 바람직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 평화, 복지, 개발을 연계한 '남북 협력 발전' 구상을 실행 가능한 정책으로 준비해야 할 때다." (<북조선 연구>, 374쪽)정세현 전 장관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통일 비용을 계산하는 데 늘 투자 비용만 계산했지 분단 시대에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했던 분단 비용을 빼지 않은 것이었어요. 통일이 되면 분단 비용은 통일 비용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통일 비용을 계산하려면 투자 비용에서 분단 비용을 빼야 순투자 비용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럴 빠뜨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 7000만이 넘는 국내 시장을 가지고 남쪽은 하이테크, 북쪽은 노동 집약적 산업을 발전시키면 최근의 중국처럼 고속 성장도 가능합니다. 요새 청년 실업 때문에 고민인데 남이나 북이나 일자리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결과고요. (…) 남북이 경제 교류, 협력을 하고 남북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요." (<정세현의 정세 토크>, 26~30쪽)
서동만 교수, 정세현 전 장관이 말하는 방향은 '몽상'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현실로 이뤄야 할 '과제'다. 그런 길을 닦지 않고서는 한반도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2013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이 제주도에서 만났다. 앞서 4월 15일 북한 정부는 핵무기 개발 포기를 선언했다. 이번 정상 회담은 이런 북한의 선언에 맞춰서 좀 더 긴밀한 남북 간의 교류 협력 현안을 조율하고, 더 나아가 세계에 선언하는 자리의 성격이 컸다. 한편, 이 자리에서 남측은 제주 해군 기지 건설을 중단하고,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선포했다.

2013년 7월 15일. 정부는 북한의 에너지난 해결을 위해서 남측에서 제조한 풍력 발전기를 지속적으로 공급할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서해안 일대에 풍력 발전 산업 단지를 조성하고, 거기서 생산한 풍력 발전기를 해로를 통해서 북한으로 운반할 계획이다. 이런 발표에 맞춰서 북한은 핵발전소 건설을 전격 중단했다.

2013년 8월 15일. 김정은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뉴욕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북한의 변화 노력을 설명하면서 국제 사회의 각종 경제 제재를 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한국 정부가 이런 북측의 입장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이날 유엔 총회에서는 전격적으로 북한 지원을 위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2013년 12월 17일. 국제 사회의 지원으로 북한의 경제 사정이 급속도로 호전되면서 북한 체제가 안정되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이날 김정은 부위원장은 개성처럼 남한 기업이 들어오는 경제 특구를 북한 곳곳에 다섯 곳 이상 만들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남북 대학의 상호 학문 교류를 제안하며, 일단 북한 대학생 수백 명의 남쪽 유학을 건의했다.

2014년 1월 1일. 김정은 부위원장이 2014년을 '희망의 행군' 원년으로 선포했다. 김 부위원장은 남측과 국제 사회의 지원에 각별한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그는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불발된 남북 단일팀을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브라질 월드컵에서 보게 되리라고 장담했다.

한편, 남북 정부는 수년간에 걸쳐서 남북의 국문학자들이 공동으로 제작해 2013년 발표한 <겨레말대사전>에 맞춰 교과서, 공문서의 맞춤법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실무 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움직임에 호응해 남쪽의 몇몇 출판사는 <겨레말대사전>에 맞춰서 편집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함께 읽기<정세현의 정세 토크>(정세현 지음, 황준호 정리, 서해문집 펴냄)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따뜻한손 펴냄)
<냉전의 추억>(김연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피스메이커>(임동원 지음, 중앙books 펴냄)
<북조선 연구>(서동만 지음, 서동만 저작집간행위원회 엮음, 창비 펴냄)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와 함께 북한 체제의 성립 과정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책은 서동만의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1945-1961>(선인 펴냄)이다. 서동만의 이 책은 전 세계 북한 연구자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역작이다. 심지어 북한의 연구자도 이 책을 참고한다는 후문이다.

이종석의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역사비평사 펴냄), <북한의 역사>(이종석·김성보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백학순의 <북한 권력의 역사 : 사상, 정체성, 구조>(한울 펴냄)도 현대 북한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꼽힌다. 현재의 남북 관계를 '분단 체제'의 틀로 분석한 백낙청의 다음의 작업도 한반도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지침이 된다.

<흔들리는 분단 체제>(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한반도식 통일, 현재 진행형>(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강양구 기자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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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2

[PRESSIAN] 김근식 경남대 교수와 김창수 전 청와대 행정관 좌담회

"MB, 지금이 남북관계 돌파구 만들 기회다"

[전문가 좌담] "김정일 만났던 박근혜가 조의 표명하면…"

기사입력 2011-12-20 오전 8:14:17

<프레시안>은 19일 북한 및 남북관계 전문가인 김근식 경남대 교수와 김창수 전 청와대 행정관의 긴급 좌담회를 열고 김정일 사망 이후의 정세 전망과 향후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을 짚어봐다.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한 이번 대담에서 패널들은 김 위원장의 사망이 북한에서 급격한 변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은 적으며, 한국 정부는 오히려 경색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음은 이날 좌담회 전문.

▲ 김정일 사망을 특별방송으로 보도한 북한 <조선중앙TV> 방송화면.

"52시간 조용했던 북한, 위기관리 체제 정상 작동 증명"

프레시안 :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에는 하루 뒤 발표했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틀이 지나 알려졌다. 52시간의 공백 동안 북한의 움직임은 어땠을까.

김창수 : 현재까지의 언론 보도를 보면 그 동안 북한은 내부 체제 단속을 위한 점검 시스템을 만들고 김정일의 사인을 밝히는 후속 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52시간의 공백은 오히려 북한의 위기관리 체제가 잘 작동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정일 사망 이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관련된 정보가 잘 통제되는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근식 : 그 사이에 당이나 국방위원회, 군의 엘리트들이 대책을 논의했을 텐데, 가장 큰 이슈는 김정은 후계체제로의 순탄한 이행, 그를 중심으로한 권력 이양, 주민 동의나 대외 특이동향 점검 등이었을 것이다. 52시간 동안 의견 조율이 합의되고 끝난 상황에서 사망 소식이 발표됐기 때문에, 큰 사건이었지만 초동 대응은 잘 했다고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그동안 중국, 러시아와 조율에 들어가 김정은 후계 체제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암묵적으로 이끌어내는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대외적 지지를 얻고 대내으로 권력이양을 순탄한 진행했다는 자신감을 확보한 측면이 있다. 반대로 52시간 동안 남쪽은 몰랐다는 것은 굉장한 문제점으로 보여진다.

프레시안 :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중국 측에 사전 통보가 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인가?

김창수 : 단정하긴 힘들지만 현재 북중관계를 고려할 때 52시간 동안 북한의 위기관리 체계가 작동됐다면 중국과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망 직후가 아니더라도 발표 전에 긴급조치를 발표하겠다 정도는 통지됐을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 94년 김일성 사망 시에는 남측에 사전 통보가 왔었나?

김근식 : 당시도 남북이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핵문제로 긴박한 상황이었고 2000년 정상회담을 한 이후에나 화해협력이 돼 조문단이 오고갔다. 따라서 94년 당시 상황상 사전 통보는 무리였고, 다만 남측 정보당국은 알고 있었을 수 있다. 두 차례 정상회담 이후 많은 사람이 오고가고 북측에 개성공단까지 있는 현재 상황에서 눈치 못 챈 건 국정원 등 정보라인이 북한에 대해 장님이 됐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김창수 : 다른 시각으로 보면, 기본적으로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최고지도자의 유고 동향은 우리 안보에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온갖 촉수를 세우고 있는 건 분명한데 정보를 세세히 얻을 수 있느냐는 달리 봐야 한다. 예전 관례를 보면 김정일이 80일 동안 안 나타난 적도 있었고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를 경우도 많았다. 며칠씩 안 나타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우리 측이 항상 즉각 파악한 건 아니었다.

이번에 특별방송을 하겠다고 발표할때까지도 몰랐는데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북한이 예를 들어 핵문제 관련 발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긴급방송을 사전 예고할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 식이라고 예측했을 수 있다. 또 한미 정보당국이 그 동안 김정일의 건강 상태에 대해 대체적으로 4~5년 생존이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 못한데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망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에 가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정보능력 부족이 대통령의 행보에까지 영향을 미친데 대해서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일부 보도에는 타살설, 테러설, 정변설까지 나오는데.

김창수 : 북한의 발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수는 있다. 개인적으로 북한의 발표는 사실이라 본다. 김정일이 건강 이상으로 사망했을 것이라 보는데, 그간 건강 이상설에 대해 많이 확인된 부분이 있었고, 김정일 사망 원인이 만약 건강 이상이 아닌 다른 요인이라면 52시간 동안 소식이 잘 관리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 우리나 미국 정보당국이 그것을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외국 조문 안 받기로 한 것, 94년 조문 논란 영향 미친 듯"

프레시안 : 북한은 외국의 조문단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김일성 사망 당시에도 같은 입장이었나?

김창수 : 당시에는 그런 언급이 없었고 통상적인 과정을 거쳤다. 이번에 안 받겠다는 것은 김일성 이후 발생했던 조문 파동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한다. 그때처럼 김정일 사망에 대한 불필요한 논란이 사망 자체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본다. 이명박 정부 입장에서도 한 시름 덜어주는 측면도 있다.

한편으로 중국에 사전에 알려줬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보면, 중국 측의 조문단을 비공식적으로 받을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체제 안착 과정에서 북중이 서로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중국도 김정은 체제의 안착이 필요하고 북한도 중국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향후 북중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징표 측면에서라도 받을 확률이 있다. 당장은 공개하지 않겠지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추후 공개하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본다.

김근식 : 조문단 안 받겠다는 게 특이한 사안인 것은 맞다. 정상적이라면 조문단 왕래는 다양한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외교의 장이다.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호상(好喪)이 아니기 때문인듯 하다. 김일성 사망도 급작스러웠지만 83세로 장수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70세도 채우지 못했다. 두 번째로, 국가영도자의 죽음을 맞은 북한의 분위기가 94년과 비교했을 때 사뭇 차분한 분위기다. 당시처럼 애도의 물결이 넘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프레시안 : 북한의 붕괴를 바라는 이들은 체제의 취약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조문단의 방문을 거절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김창수 : 조문단을 받으면 평양에 가서 북한의 통제를 벗어나 사회 곳곳를 뒤지는 게 아니다. 취약성이 노출되지 않는다. 조문단은 한 국가를 대표하는 제한된 사절단이라 그런 분석과는 큰 관련이 없다. 가령 북한이 아리랑 공연을 할 때 관광객들을 많이 받았고 관광객들은 조문단보다 훨씬 많은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체제 취약성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프레시안 : 김정일 위원장이 2008년 9월 뇌졸중으로 한번 쓰러졌는데 그때야 말로 김정일이 곧 사망할 것이란 얘기가 많았고 현재는 회복됐다는 분석이 우세한 상황이었는데.

김근식 : 잘못된 진단을 내린건 아니고 2009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당시 대통령 주치의가 김정일을 장시간 관찰한 결과 직무수행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중국의 다이빙궈(戴秉国) 국무위원,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방북했다. 현정은 회장도 4시간 동안 김정일을 만났다. 위키리크스가 김정일이 지난해 줄담배를 피웠다는 외교전문도 공개했다.

김정일의 최근 몇 년간 대외 활동과 올해 중국·러시아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가 회담을 한 것을 보면 업무 수행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사망한 것은 기차에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 응급처지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 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프레시안 : 김일성은 1945년부터 1994년까지 49년간, 김정일은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을 통치했다.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로 치면 거의 40년이다. 84년 생인 김정은은 2010년 후계자로 지명됐는데 김정일이 없는 북한은 이제 어디로 갈까?


▲ 김근식 경남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김근식 : 김정은 후계체제가 안착하기 전에 유고사태를 맞이해서 북한의 불안정성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봐야한다. 하지만 사망 초기 이틀 동안 큰 동요 없이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권력 이양이 순탄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김정은의 위치와 리더십, 카리스마, 정치적 정당성의 정도는 1994년의 김정일보다 약하다는 사실이다. 김정일은 20년 넘게 후계자 준비를 해 왔다. 전반적 영역에서 경험을 쌓아 당의 리더십을 장악했고 1991년 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군 통제권도 확보한 상황이었다.

김정은은 짧게 보면 작년 9월부터 채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것도 김정일의 후광을 업고 현지지도를 다녔다. 내년에 강성국가를 만들어 가야하는데 김정일이 사라진 공백기에 김정은이 경제 차원에서 주민들을 독려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북핵 문제도 북미협상은 재개되겠지만 최고지도자가 결정을 내릴 시점이 있다.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UEP)을 어떻게 할 것이냐 평화협상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백날 강석주, 김계관이 해봤자 결국엔 김정일이 결정해주는 건데 이제 구심점이 없어지면면서 결정은 미뤄지고 시간이 소요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다.

프레시안 : 협상파과 강경파가 대결할 때 중재 역할로서 리더십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김근식 : 김정은의 후견 그룹이 당내 엘리트를 얼마나 장악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내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대중들에게 설명하고 이끌고 선두에 서서 선전할 수 있으냐를 보면 취약하다. 둘째, 정치 엘리트 내부의 갈등이다. 작년 9.28 당대회 이후 뜨는 별이 있고 지는 별이 있었다. 뜨는 별로는 리용호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최룡해 당비서가 급부상했고, 지는 별로는 김영춘 정치국위원, 오극렬 정치국 후보위원 등이 있다. 장의위원회도 '지는 엘리트'의 순번은 뒤다. 이 엘리트 사이의 알력을 김정은이 잘 조절하지 못하면 중장기적으로 갔을 때 내부적 불안정성은 취약하지 않을까 싶다.

김창수 : 첨언하자면 김정일 체제는 후계 체제에 대한 개념과 논리를 만들고 실제 시스템을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 성립도 되지 않았던 후계체제 논리를 만들어 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 이후 후계자로 등극했다.

김정은 후계체제가 나오기 전에 북한 연구자 사이에 벌어진 논란은 과연 3대 세습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세습, 집단지도체제, 과도 체제에서 3대 세습으로 가는 이론이 각각 제기됐다. 이제 3대 세습으로 간 상황이라면 후계체제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했던 당시 분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후계체제를 정당화하는 개념과 논리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이를 바꾸고 집단지도체제로 가려면 또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야 해서 결국은 3대 세습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게 당시 주장이었는데 현재를 보면 맞아떨어진 셈이다. 또한 김정일이 후계체제에 대한 개념부터 시스템까지 만들었자면 김정은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에서 올라타는 방식으로 가기 때문에 선대와 달리 압축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이미 최근 몇 년간 김정은 체제의 틀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틀 자체는 유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의 이념 갈등처럼 정치 중심 노선과 경제개발·실용주의 사이의 갈등이 북한 내에도 있어왔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국가영도자의 역할을 김정은이 어느 정도로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프레시안 : 1994년 당시 김정일이 김일성의 3년상을 치르면서 대외관계를 동결시켰는데 앞으로도 북한이 수세적으로 갈 것인지 궁금하다.

김근식 :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이 확고한 역량과 리더십, 정책적 경륜을 100% 습득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상당 기간 테크노크라트에게 결정을 위임할 수 있다. 북핵 문제는 강석주, 대남정책은 김양건, 경제는 최영림 등 각 영역에서 김정은보다 전문 역량이 있는 이들에게 위임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김정일이 결심한 바에 따라 움직이던 이들이라 자신들이 결정한 적이 없어서 과거와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이러한 배경 하에 테크노크라트와 김정은 모두 과감하게 결정을 못해 미뤄질 가능성이다. 실기(失機)하는 것이다. 앞으로 북미협상을 지켜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흘러가면 북한도 대외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통치의 정당성 강화에 집중하면서 대외정책은 김정일이 공언한 정도를 지켜내는 수준에서 상황을 보자는 정도로 갈 수 있다.


▲ 김창수 통일맞이 집행위원. ⓒ프레시안(최형락)
김창수 : 현 시점에서 북한의 대외관계는 북미관계,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 남북관계가 있다.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이 결과적으로 수세적이었지만 주목할 점은 대미 관계에 있어 그해 10월 제네바 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협상 타결을 위한 실무접촉은 유지된 셈이다. 당시 대남 관계는 단절됐는데 이는 수세적 태도도 있었지만 조문 파동을 불러일으킨 남측 정부와 관계개선을 원하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앞으로도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는 유지될 것이다. 주목할 점은 올해 1월 후진타오(胡錦濤 ) 중국 국가주석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결과다. 당시 두 정상은 남북대화 유지 및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을 하기로 했는데 결실을 맺지 못했다. 최근 몇 차례 북미접촉 통해 UEP 동결 합의와 영양 지원까지 합의된 것은 그 정상회담의 연장선상에 있다.

문제는 내년이 국제사회에서 모든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 행사하는 국가들의 리더십 교체기라는 점인데, 그 시기에 북한이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 것인가에 있다. 현재로서 그 가능성은 유동적이다. 북한이 현재의 수준은 유지해도 새로운 환경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만들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프레시안 : 국내 언론들은 김정은의 리더십이 약하면 군부가 들고 일어날 수도 있고 탈북자가 증가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를 내놓고 있다.

김근식 : 군부가 최고지도자에 저항하는 것은 북한의 수령제 구조에서는 불가능하다. 군부가 따로 독립해 국방위원장이나 최고사령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방위원회의 정치국 상무위원 등은 사실 당 사람이면서 군에 가있기 때문에 군이 자기의 당과 분리된, 후보자와 분리된 이해관계 때문에 후계 체제에 저항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다만 김정일이 후계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형식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2009년 헌법을 개정해 국방위의 권한을 강화하고 국방위원장을 영도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지난 4월 최고인민위원회에서 김정은, 리용호, 최룡해 등은 국방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 장의위원회 명단을 봐도 당, 정치국 인사들이 전면에 섰고 국방위 위원들은 뒤로 밀렸다. 국방위를 중심으로 통치하기엔 김정은이 아직 맡고 있는 직함이 없어서 배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창수 : 북한의 기본 권력구조상 군부가 최후까지 체제를 유지하는 수호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현재 체제에서 이탈하리라는 발상은 북한 연구자 입장에선 타당성이 없다.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내세우면서 군이 모든 결정과정에서 우위에 있던게 오히려 비정상적인 과정으로 봐야 한다. 최근에 이러한 경향이 정상화됐고 이는 김정일을 호칭할 때 당 명칭을 앞세우고 군 직함을 뒤로 빼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미국과 중국의 향후 움직임은?

프레시안 : 중국·미국의 향후 움직임은 어떻게 될까? <뉴욕타임스>는 오늘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경고했는데.

김근식 : 중국은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명했고 94년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김일성 사망에 애도를 표명한 것처럼 미국도 유사하게 갈 것이다. 중요한 점은 지난 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통제할 수 없는 군사적 긴장은 피하자고 합의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북한과의 협상을 진전시켜서 미국이 다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야 북한의 불안정성을 완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에 정치적 급변이나 소요사태는 중국과 미국 둘 다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김창수 :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에 미국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적절한 관리를 해야 할 필요성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내년에 미국도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북한과 적극적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불확실한 상황이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

때문에 적극적이지도, 악화되지도 않은 현상 유지 국면이 올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 정부의 반응도 호들갑보다는 냉철하게 관찰하는 편에 가깝다. 미국은 지금까지 유지해온 대화를 좀 더 시간을 두고 추진하지 않을까 한다. 중국 역시 변방에서의 불확실성을 원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 미국의 대북 접근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라는 의견과 현상 유지로 갈 것이라는 분석이 각각 나왔는데, 극소수 사람들은 미국이 북한을 무너트리길 기대하기도 한다.

김근식 : 중국이 있어서 쉽지 않다. 중국이 북한을 포기하면 그럴 수 있겠지만 북중관계가 전략적 협력관계로 격상된 상황에서는 어렵다. 미국이 그렇게 나오려면 북한 내부의 불안정성이 최고조에 달해 방아쇠를 당기면 터진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다. 군사적 임계점이 와야 현실화될 것이다.

김창수 : 미국이 동북아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대중정책이다. 한국의 일부 세력은 미국이 압박하고 군사조치를 강화하는 게 희망상황일 수 있지만 대중정책 추구하는 미국 입장에서 북한 압박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그런 압박이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북중관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가서 미국의 대중국 전략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만을 독립적 변수로 놓고 압박할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한국 정부, 조문 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


▲ 이날 좌담회를 진행한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결국은 한국의 대응이 미국, 중국이 나아갈 방향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인데, 일단 민주당에서는 조의를 표명했고 통합진보당도 애도를 표했다. 정부 차원에서 조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김근식 : 가장 중요한 건 이명박 대통령의 입장이다. 김정일이 사망한 오늘은 일단 통상적인 국가안전보장회의, 군 공무원에 대한 경계령을 내렸다. 남북관계가 4년 동안 중단되고 교착되는 것을 반복해왔는데 김정일 사망으로 이를 돌파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모멘텀으로 삼을 창조적인 지혜가 이 대통령에게 있을 것인지가 중요하다.

예컨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당시 남북관계의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도 김양건이 조문단으로 왔다. 그래서 이 대통령을 만나고 나중에 정상회담 합의까지 갔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지도자가 사망했을 때 그 시점에서 돌파구가 마련되는 게 역사적 현실이었다. 이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관리할 독자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면 오히려 이번이 기회다.

프레시안 : 적어도 차분하게라도 조의를 공식적으로 표명해야 한다는 것인가.

김근식 : 조문단을 받지 않으니 조의나 유감 표명도 할 수 있고 조전을 보낼 수 도 있다. 통일부나 현대아산 명의 등 수위를 조절할 수도 있다. 남북관계를 위해 북한을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신뢰의 시그널을 보내면 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내년 핵안보 정상회의에 김정일을 초청했었고, 기자회견 때마다 이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전직 두 대통령이 각각 만나 합의를 도출했던 상대다. 94년 상황과는 다르다. 그 동안의 남북관계 개선 상황을 감안하면 전향적인 표명으로 신뢰 개선이 가능하다.

김창수 : 정부는 우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최우선 원칙으로 세워야 한다. 지금은 비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수습될 수 있는 남북 간의 사건도 수습되지 않는 상황으로 발전, 확산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철저히 위기관리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북한 상황을 냉철하게 주시하고 북한의 상황이 남한으로 확산되는 걸 막아야 하는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

둘째로 국민들이 군사적 충돌이 발생해 남북관계의 위험으로 번지는 것을 염려하는데, 오늘도 주가가 요동을 쳤다. 과거 남북관계에 우발적 충돌이 발생하면 주가가 하락했다 반등하면서 '큰손'들만 이익을 챙기곤 했다. 이런 상황이 되면 국민들만 피해를 보는데 현재 글로벌 경제 위기의 장기화가 점쳐지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상황을 잘 관리해 위험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조문도 이 원칙과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남북간의 상황도 악화되지 않고 내부적으로 국론이 요동쳐서도 안된다면 이를 충족시키는 것은 정부가 의젓한 태도로 조의를 표명하는 게 바람직하다.

프레시안 : 조의 표명이 남북관계를 개선할 호기하고 했는데 국내 정치만 보면 상당히 답답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김근식 :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에 대결 구도가 생기기 전에 정부가 주도권을 잡고 정리해줘야 한다. 이를 미루면 진보 진영에서 조문 얘기가 자연스레 나올 것이고 보수 진영에서 반발하면서 김정일의 악행을 보수 언론들이 싣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남남갈등이 격화되면 여야 싸움이 되고 정쟁화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국내 정치권이 김정일 사망을 남북관계 개선의 호기로 보는 게 아니라 김정일 사망이 국내 정치 파동의 근원이 될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김정일과 만난 인연도 있고 하니 조의 표명을 하는 수준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이 대통령이 하기 어렵다면, 박근혜로서는 이 대통령과 선을 그을 필요도 있고 비대위원장으로서 쇄신과 혁신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말 한마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정부 차원에서 힘들다면 박근혜로도 괜찮다는 것인가.

김근식 : 이명박 정부는 지난 4년간 북한에 해온 일이 있어서 그런 기조를 떠나기 힘들 수 있다. 그런 기조를 버리길 바라지만 박근혜가 정당 자격에서 평범하게 조의나 유감을 표명하고, 한반도가 이 일을 계기로 평화롭게 갔으면 한다는 원칙적인 말을 할 수 있다.

김창수 : 우리 사회가 다원주의 사회기 때문에 북한 문제를 놓고 의견이 다양하게 표출되는 건 다양하다. 하지만 양극단에서 충돌하는 상황으로 가서 그 극단이 중간의 여러 세력을 대표하는 방식으로 여론이 잘못 형성되면 문제다.

그렇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 정부가 기준점을 잡을 필요가 있다. 북한이 외국 조문단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정부에겐 부담을 덜어준 셈이다. 조문단 문제가 논란의 화약고가 될 수 있었는데 안 받겠다고 하니 극단적 논쟁으로 빠질 수 있는 상황은 예방됐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가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 수준에서 표명했으면 한다.

프레시안 : 김정일 사망이 일종의 '북풍'이고, 결국 박근혜 위원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겠냐는 얘기가 은연 중에 나오고 있다.

김근식 : 민주당도 비대위를 구성했는데 과거 김대중 대통령 서거시 조문단이 왔으니 우리도 가야하는 게 아니냐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의 표명 문제는 정부에 맡기고 당은 북한의 안정성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남한에서 화약고 될 수 있는 문제를 치고나갈 필요는 없다.

김창수 : 내년 선거 국면에서 한반도 통일 이슈가 최대 이슈로 부각할 가능성이 있다. 이전까지 복지 문제나 양극화 문제, 사회정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였고, 이명박 정부에서 대북정책이 망가진 상황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평화통일이라는 헌법상 의무를 할 수 있겠느냐 정도였다.

이제는 김정일 사망 이후 종합적인 큰 틀에서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불확실한 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의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이슈가 등장할 것이다. 또 최근 약화되어가던 흑색선전이 선거 국면에서 검증을 빌미로한 네거티브 선거로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각자가 김정일 사망을 보고 느끼는 소회는.

김근식 : 오늘 뉴스를 보고 여러 생각이 났다.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하고 김정일이 최고지도자가 됐는데 아버지로부터 부채만 떠안아 어려운 시기를 겪다 해결을 못하고 사망했다. 17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해보려고 했던 일도 부시 행정부나 남북관계 경색 등 국제환경이 맞지 않았다.

북한을 정상화하고 개혁·개방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와 좌절을 겪었고 2012년 김일성 100주년을 계기로 강성국가를 만들어보겠다고 했지만 새해를 한 달로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문턱도 못 넘은 셈이 됐다. 17년 동안 하루도 편한 잠을 못자던 시기였을 것이다. 죽고 나서도 후계자에게 더 큰 숙제와 부채를 넘겨주고 갔다. 한반도의 안타까운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창수 :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백낙청 선생이 말한 분단체제론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남한과 북한은 독립된 구조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북한과 남한은 체제 차원에서 영향을 미친다.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으로 작용하면서 경제, 안보 불안으로 작용하듯 앞으로도 북한의 안정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남한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북한의 체제가 현재 상황을 안정적으로 극복해 나야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현재 북한 상황에 대한 섣부른 예단을 하지 않는 것이다. 북한을 부추겨 원하는 상황으로 진단하고픈 마음을 접고 냉철하게 북한 상황을 분석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김봉규 기자(정리)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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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of Kim Jong Il: Now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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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of Kim Jong Il: Now What?
By John Delury and Chung-in Moon


After 17 years at the helm of North Korea, the Dear Leader is no more, and suddenly we are faced with a reality on which so much "contingency planning" has been based. So, what can we expect of the next chapter in the North's political history? And how should the key players—South Korea, the US and China—navigate this sensitive and critical transition period?

In April, we argued in an essay for 38 North that the succession process appeared to be going smoothly; for now, a few days after the death of Kim Jong Il, we stand by that assessment. We see no evidence of near-term political crisis or confusion as to the new pecking order; no sign of immediate factional struggles, popular revolt, or systemic breakdown. In this, what Time magazine has called "the Year of the Protestor," when dictators were overthrown, tried and shot, there remains no hint of a Pyongyang Spring to come. Kim died of natural causes.

Why is near-term crisis unlikely? For the same reason that a senior North Korean official told one of us that comparing North Korea to Libya is "laughable:" the country's political system is unified around the new face of North Korea, Kim Jong Un, the son of Kim Jong Il and, most important, the grandson of founding father Kim Il Sung. Think of him surrounded, and protected, by three inner circles. The first circle is the ruling family—here, the key sign of unity is that Kim Jong Un's aunt and her powerful husband Jang Songtaek both received promotions along with the heir-apparent at the historic Party conference last year. The second inner circle is the Korean Worker's Party itself, which has been going through a period of resuscitation in recent years. The revitalized network of Party members, who now carry cell phones and are eager to travel abroad, see their prospects linked to the success of the grandson.

The third circle is the military – the Korean People's Army – which would be the logical competitor for power with the next generation Kim, but here too, there is no sign of high-level disaffection, like that seen in many Arab Spring states. The military has been the primary beneficiary of the North's "military first politics" campaign that Kim Jong Il initiated in 1995. In addition, Kim has co-opted the military through numerous incentives, while controlling it through his close confidents. So far, the military has pledged its unfailing loyalty to Kim Jong Un, whose highest title is vice chairman of the central military committee of the Korean Worker's Party.

But what then of the outer circle, the 20 million or so North Koreans not in the Party, not members of the "core" class? Kim Jong Il was not beloved like his father, and pragmatic North Korean civilians are likely to take a wait-and-see approach to the new leadership group. Kim Jong Un bears a striking physical resemblance to his grandfather, evoking nostalgia for North Korea's halcyon days, and people may hope this starts a new, better chapter for their country. Even those who may wish to rebel have no networks or organizations through which to do so. There are not even the rudiments of civil society to organize resistance. So for now, all signs point to what the state media is saying: Kim Jong Un is the "outstanding leader of our party, army and people" and "great successor" to his father.

The Long-term Dilemma: Security Plus Prosperity

So in the near term, the chances of political crisis, let alone regime collapse, appear remote. But in the medium to longer term, the new Kim Jong Un leadership is likely to face a dilemma, and this should be the focal point of international responses to the transition process. It's a dilemma created by two mutually conflicting goals that the regime has set for itself.

Pyongyang has been loudly promising its citizens that 2012 marks the year of North Korea's emergence as a "strong and prosperous great nation" (Gangsong Daeguk). If Kim Jong Il could claim nothing else, he did achieve at least one thing for North Korea—the ultimate "strength" of nuclear deterrence. Now, it's up to his son Kim Jong Un to achieve the other half of the equation: prosperity. Over the past few years, there have been unmistakable signs of a push to improve the national economy—from growing trade with and investment from China, revived plans for special economic zones and official propaganda promising to improve the people's welfare. In numerous direct contacts with North Korean officials, including a visit to Pyongyang a couple of months ago, both of us have witnessed these developments first-hand.

But the issue at stake is whether Kim Jong Un can enhance North Korea's prosperity without undermining the source of its strength – its nuclear weapons program. Food aid and foreign economic assistance are urgently needed to ensure a smooth path to the first year of Gangsung Daeguk. Comprehensive economic development would also require foreign investment, trade, and financing; all of that would require an initial loosening and eventual lifting of the sanctions regime that surrounds the North Korean economy like a barbed wire fence. Getting that sanctions regime lifted will require substantive nuclear concessions on Pyongyang's part.

It is in that moment, the transition from security-first to security-plus-prosperity, when the unity of the North Korean political system would come under strain. Elements in the military might oppose sacrificing their prize possession – nuclear weapons capability. Hardliners will argue it would be a fool's errand to give up the ultimate weapon, leaving their country exposed to an Iraqi or Libyan fate. Therefore, the path to getting the North over that hump starts now, with building constructive relationships with their new leadership, and avoiding the risk of playing into the hands of hardliners.

International Response: Open Channels

So, the essential question is, what should the international community do? The most prudent course for key players in the region is to re-open or expand channels with Pyongyang in the days, weeks and months to come. The better we know the new leadership, the better we can respond to events as they unfold. For now, we expect Pyongyang to turn inward, focusing on the funeral and mourning the loss of their leader. And Kim Jong Un may take a backseat even for a period of three years (in accordance with Korean mourning traditions, and the precedent set by his father after his grandfather's death in 1994). The more that Seoul, Washington and Beijing can do to draw out the new North Korean leaders as Kim Jong Un receives further promotions – Kim Jong Il's 70th birthday is celebrated in February and Kim Il Sung's 100th in April – the better.

Fortunately, the US has some modest positive momentum to build on in crafting this kind of proactive diplomatic outreach. US-North Korea bilateral talks have been held in Pyongyang, New York, Geneva and Beijing on issues ranging from humanitarian aid to denuclearization. The timing of these revived channels is fortuitous, and Washington should make the most of them, signaling readiness to work with the new powers in Pyongyang in a constructive fashion. The key precedent is the bilateral negotiations between the US and North Korea that were thrown into doubt by the sudden death of Kim Il Sung in 1994. At that time, officials in the administration of President Bill Clinton stayed engaged, and sure enough, Kim Jong Il came around to signing the Agreed Framework, which froze the North Korean nuclear program for the rest of the 1990s. US Secretary of State Hillary Clinton would be wise to take a page out of President Clinton's handling of that critical moment, and her measured, constructive comments in response to Kim Jong Il's passing are an encouraging sign.

Seoul's reaction is even more crucial, and delicate. The South Korean public is divided over inter-Korean relations, and President Lee Myung-bak will take a hit whichever way he steps. But there have been increasing signs of fatigue with a hard-line approach, and this president, who has proven his conservative credentials, is uniquely positioned for a kind of "Nixon in China" moment. That may be a bridge too far for the Blue House. An expression of condolence would have been a bold statement of Korean solidarity in the face of ideological division, but the Unification Minister announced only "allowing" an unofficial delegation. But at a minimum, prudence would dictate avoiding any sign of an offensive or threatening posture. Self-restraint in Seoul will encourage moderation in Pyongyang.

Beijing, it turns out, probably has the best model for how to handle North Korea, particularly in sensitive times like the present. Chinese realists spend far less time thinking about scenarios of North Korea's collapse, and instead, keep diplomatic channels open at the same time that they support economic opening. China also has military-to-military ties to the North, and can exert at least some leverage when it comes to moderating military behavior. In an optimistic scenario, China, South Korea and the US could use this changing of the guard to embark on a coordinated, constructive engagement policy to normalize, and denuclearize, the Korean Peninsula.

For years, political analysts and military planners have discussed "contingency plans" for after the death of Kim Jong Il. But now, with Kim actually dead and no sign of chaos or collapse, what we need is prudent and realistic diplomacy that lays foundations today for progress tomorrow.

John Delury is Assistant Professor of East Asian Studies at Yonsei University, Seoul, and a book review editor for Global Asia. Chung-in Moon is Professor of Political Science at Yonsei University and Editor-in-Chief of Global Asia.

2011-12-21

[한겨레21 기사돌려보기]경찰의 거짓말 릴레이를 좇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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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거짓말 릴레이를 좇아가다 [2011.12.20. 제891호]
[표지 이야기] 단독범행 몰고가려 청와대 외압, 금전거래 대가성 부인한 경찰…일선 경찰 입 막다 금전거래 폭로되자 수사팀에 책임 돌리는 수뇌부 거짓말의 재구성

경찰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사고를 치고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피의자와 마주하는 느낌을. 지금 경찰을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이 그러할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의 디도스 공격을 둘러싼 금전거래를 은폐한 경찰의 발표 내용은 한마디로 오락가락·뒤죽박죽이다. 경찰 발표 내용의 앞뒤를 맞춰보면, 거짓말의 수준은 몰상식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도덕의 언저리를 벗어난다. 경찰 조직 전체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거짓말로 눈가림하려는 경찰 수뇌부의 꼼수 탓일 것이다. 공연히 욕먹고 있을 일선 경찰들만 불쌍하게 됐다. 슬프게도 '권력의 지팡이'로 전락해버린 경찰의 거짓말 릴레이를 살펴보자._편집자

"금전거래 없었다?"

경찰은 지난 12월9일 선관위 누리집 공격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금전거래는 없었다고 못박았다. 그날 보도자료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공아무개씨와 디도스 공격자들에 대한 계좌·신용카드·이메일 및 압수물 분석을 한 결과, 현재까지는 본건과 관련하여 준비자금 또는 대가 제공을 확인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겨레21>이 12월14일 누리집을 통해 "디도스 공격 '금전거래' 있었다"라고 단독 보도하자,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그날 바로 말을 바꾸었다. 경찰은 수사 내용을 그때까지 숨기다가 사실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자 마지못해 인정하는 모양새였다. 경찰이 실토한 내용도 기사와 똑같았다. 디도스 공격을 전후해 김아무개(30·박희태 국회의장 비서)씨와 공아무개(27·최구식 국회의원 비서·구속)씨, 강아무개(25·정보기술(IT)업계 대표·디도스 공격 담당자·구속)씨 사이에 수차례의 돈거래가 있었다는 내용이다(표 참조).

이에 대해 경찰은 계좌추적이 뒤늦게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찰도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다는 말이다. 황운하 경찰청 수사기획관은 12월14일 "12일 계좌추적이 끝나기까지 금전거래에 대한 진술만 있을 뿐, 이를 증명할 만한 물증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사정 당국 관계자는 "경찰은 이미 12일 이전에 계좌 기록을 확인했고, 8일 수사 결과 발표 때 계좌 내용을 발표할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고 말했다. 경찰은 12월8일에도, 12일에도 금전거래를 둘러싼 진실을 말하길 거부했다.


사정당국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청와대 치안비서관은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경찰청으로 직접 전화해 "손발 안 맞아 뭐를 할 수가 없다"고 역정을 냈다. 경찰 수사 혹은 '사고' 수습 과정에서 청와대가 직접 나서 조율을 했다는 의미다.

"청와대 직원은 없었다?"

박희태 국회의장의 비서인 김아무개(30)씨는 디도스 공격이 있기 하루 전인 지난 10월25일 저녁 서울시내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경찰의 처음 발표를 보면, 이 자리에는 김씨 외에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 비서 김아무개(34)씨와 공성진 전 의원 비서 출신 박아무개(35)씨 2명만 있었다. 술자리는 서울 강남의 단란주점에서 2차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 합류한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 비서인 공아무개씨는 그날 밤 술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새벽까지 문제의 디도스 공격을 지시했다. 앞뒤 맥락을 보면, 20대인 공아무개씨의 단독 범행으로 이해하기 힘든 정황이 만들어진다. 경찰의 단독범행론에 대해 각종 언론에서 토를 다는 이유이기도 했다.

경찰의 거짓말은 곧 들통이 났다. 지난 12월8일 언론매체들은 문제의 술자리에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인물은 청와대 국내의전팀 박아무개 행정관이다. 그는 문제가 된 1차 술자리에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황운하 수사기획관은 12월9일 기자 브리핑에서 "참고인에 불과한 사람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보면서 인권을 처음 생각했다. 직접 관련이 없다면 공개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뒤늦게 해명했다. 그렇지만 경찰은 1차 술자리에 참석한 정두언 의원 비서와 공성진 전 의원 비서의 신원은 밝혔다. 경찰의 인권 보호는 청와대 인사를 위해서만 적용된 셈이다. 여러 언론매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 궁색한 변명"이라고 해석했다.

청와대 인사의 인권이 남다르긴 했나 보다. 박 행정관은 12월7일 경찰 소환에 응했으나 조사를 거부했다. 다른 참고인과 피의자는 경찰청 별관에서 심문을 받았지만 청와대 행정관은 취재진의 눈을 피해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조사받았다. 경찰이 청와대 주변에 둘러친 '방화벽'이 뚫리자,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불길을 잡았다. 청와대는 12월8일 "박 행정관이 공씨와는 무관하게 평소 알고 지내던 후배들과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왜 이렇게 무리수를 뒀을까? 경찰의 다음 거짓말들을 따지다 보면 실마리가 나온다.

» 검찰 특별수사팀 수사관 가운데 한 명이 12월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최구식 한나라당 의원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한 뒤 짐을 옮기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외압이 없었다?"

이영상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장은 12월12일 경찰 내부망에 올린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수사 후기'에서 "수사 진행 과정에서 어떠한 외압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점은 단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외압도 있었고, 주저함도 있었다. 사정 당국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청와대 치안비서관은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경찰청으로 직접 전화해 "손발 안 맞아 뭐를 할 수가 없다"고 역정을 냈다. 경찰 수사 혹은 '사고' 수습 과정에서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조율을 했다는 의미다. 이런 배경 속에서 조현오 경찰청장은 수사진의 주장을 무리하게 꺾어가며 수사 결과 일부를 은폐했다.

지난 12월8일 수사 결과를 공개하기 직전까지 경찰이 '잔머리'를 굴리며 오래 주저한 정황도 드러난다. <헤럴드경제>의 12월15일치 기사를 보면, 12월8일 경찰청장과 수사국장, 수사기획관 등 핵심 멤버는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두 번에 나눠 경찰청장 집무실에서 회의를 했다. 8시부터 8시30분까지는 이들 외에도 사이버센터장·사이버수사기획관 등이 동석했으며, 회의가 끝난 뒤인 10시부터 11시까지는 경찰청장과 수사국장, 수사기획관 등 핵심 멤버만 따로 청장실에 모여 다시 한번 1시간에 걸쳐 회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도 12월15일 경찰청을 항의 방문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이 사실을 시인하며 "검경 수사권 문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중대한 사안을 발표할 때 검경 수사권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는 모양이 이상하다"고 맞받았다.

"대가성 있었다, 없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특히 거짓말이 어설프면 더욱 그렇다.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12월15일 오전 보도자료를 내고 "김아무개(박희태 국회의장 비서)씨가 디도스 공격 주범인 공아무개씨에게 송금한 1천만원에 대가성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경찰이 하루 만에 자신의 말을 정반대로 뒤집은 꼴이었다. 경찰은 하루 전인 12월14일, 그러니까 <한겨레21>이 '돈거래 사실'을 단독 보도한 직후, 디도스 공격을 전후해 해커 강씨에게 전달된 1억원의 돈이 "사건과 무관한 개인적인 거래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설명을 들어보면 가관이다. 경찰은 판단이 바뀐 핵심 이유를 설명하며,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 김씨의 말에서 거짓 반응이 나왔다고 밝혔다. 불법행위를 전후해 주고받은 자금에 대해서는 대가성을 부정하면서, 거짓말탐지기의 말을 신뢰하는 꼴이었다.

이 말도 다시 반나절 만에 뒤집힌다. 경찰은 그날 오후 2시 기자들을 다시 모아 "부랴부랴 보도자료를 만들다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며 오전의 보도자료 내용을 부인했다. 황운하 경찰청 수사기획관은 "'(주고받은 돈이) 사인 간의 거래'라는 경찰 입장은 변한 것이 없다"며 "거짓말탐지기에서 거짓 반응이 나왔는데, 대가성일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면 논란이 있을 것 같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국민을 상대로 경찰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 경찰이 왜 이런 곡예를 부렸을까? 경찰의 다음 주장으로 넘어가보자.

"공씨의 단독 범행이다"

경찰은 12월8일 공씨가 술자리 중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공씨는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를 돕는 게 최구식 의원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며 "젊은 층이 투표소를 못 찾게 하면 투표율이 떨어지지 않겠나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이렇게 20대 청년은 '대형사고'의 단독 기획자가 됐다. 경찰이 설명하는 당시의 정황 가운데 한 장면은 다음과 같다.

# 공씨가 지난 10월26일 새벽 강남의 유흥주점에서 김(박희태 국회의원 비서)씨에게 "중앙선관위 홈페이지를 디도스로 때릴 수 있다는데 때릴까요?"라고 묻자, 김씨는 "절대 하지 말라"고 말렸다. 김씨는 이때 공씨의 계획을 처음 들었다.

경찰이 밝힌 이런 정황은 공씨의 '단독범행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다. 그렇지만 이 정황은 경찰의 '소설'일 가능성이 크다. 경찰이 발표한 내용을 복기해보자. 김아무개씨는 디도스 공격이 있기 6일 전인 10월20일 공아무개씨의 계좌로 1천만원을 보냈다. 공씨는 이 돈을 10월31일 강아무개씨에게 넘겼다. 디도스 공격이 성공하고 나서 5일 뒤다. 대가의 정황은 명확해 보인다.

경찰은 '어리석게도' 이를 인정해버렸다. 경찰은 12월15일 "(김씨에게서 강씨에게 흘러간) 1천만원에 대가성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말은, 김씨가 디도스 공격의 내용을 사전에 알았다는 뜻이 된다. 즉, '디도스 공격=공씨의 단독 범행' 공식은 무너지게 된다. 그렇다면 앞에서 경찰이 그려준 정황은 거짓으로 판명나게 된다. 경찰이 12월15일 반나절 만에 서둘러 말을 뒤집고, '돈거래에 대가성이 없었다'고 강변한 이유다. 경찰의 '거짓말 곡예'는 자신의 통제 수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경찰이 '실수'로 인정했듯이, 김씨가 디도스 공격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상황은 묘해진다. 김씨는 디도스 공격 가능성을 사전에 알고 청와대 행정관과 만났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우연이 겹친다. 박아무개 청와대 행정관은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의 보좌관 출신으로 2010년 이후 총리실 정보관리비서관실 상황행정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백원우 민주당 의원은 "정보관리비서관실은 온라인 등의 여론 동향을 점검하는 곳으로, 박 행정관은 정부·여당에서 온라인 시스템 등의 문제를 다뤄온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이 10월25일의 술자리에 박 행정관이 참여한 사실을 숨겨오다가 뒤늦게 밝힌 점도 사건의 정황을 둘러싼 의혹을 키우는 대목이다.

"몰랐다"

최구식 한나라당 의원은 12월2일 트위터를 통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황당한 심정"이라며 "보좌진과 주변을 상대로 확인해봤지만 제 운전기사가 그런 일에 연루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글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말이 묘하다. 묘하다 못해 해괴하다. 그는 "만약 제가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즉각 의원직을 사퇴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언뜻 책임을 지겠다는 말처럼 보이지만, 두 번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이런 대형사고에 연루됐다면 그는 이미 국회의원 자격에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된다. 그의 말은 비유하자면, '내가 100만원을 훔쳤다면, 책임지고 10만원을 돌려주겠다'는 격이다. 법 정의에 민감한 국회의원의 입에서 나왔다고 보기 힘든 말이다.

최 의원을 둘러싼 정황도 아리송하다. 경찰이 그린 시나리오를 따라가도, 김씨 등은 공씨가 주도한 디도스 공격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공격을 주도한 공씨에게 "한나라당에 엄청난 악재가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최 의원에게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김씨 역시 최 의원의 비서관 출신이다. 또 디도스 공격 과정에 참여한 혐의로 구속된 차아무개(27·IT업자)씨는 최 의원이 지역구에 내려가면 차를 모는 등 비서 구실을 했던 인물이다. 디도스 공격이 사실상 최 의원의 주변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그림이 그려진다. 이와 관련해 여권의 핵심 인사는 12월16일 묘한 말을 했다. "최구식 의원이 (서울시장) 선거 전날 몇몇 의원들과 밥을 먹으면서 '비장의 카드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최 의원의 개입을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개입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 힘든 정황도 나온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 등의 말만 믿고 최 의원을 소환하지 않았다. 경찰 수사를 둘러싼 의혹이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검찰이 최 의원실을 압수수색한 것은 지난 12월15일이었다.

» 서울 구로구에 있는 ㅅ정보통신 업체의 입구 모습. 최구식 한나라당 의원의 비서인 공아무개(28)씨의 지시에 따라 선관위 누리집에 디도스 공격을 감행한 강아무개(25)씨가 이 업체를 사실상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2월15일 이 업체를 찾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여전히 선관위 누리집 공격을 둘러싼 진실은 안갯속에 있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밝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잇따른 거짓말로 상황을 미궁 속으로 몰아넣었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12월16일 언론 브리핑을 자청해 경찰청 수사팀의 결론을 뒤집었다. 그는 디도스 공격은 우발적 단독 범행이 아닌 것으로 보일뿐더러, 배후의 돈 거래도 대가성으로 보인다며 이를 규명하지 못한 수사 실무진을 질책했다. 수사 내용에 대한 온갖 의혹을 일순에 뒤집고, 수사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폭탄 발언이었다. 경찰 수사를 책임지는 경찰청장이 지금껏 경찰의 발표 내용을 스스로 반박하는 진풍경을 연출한 셈이다. 이를 두고 언론들은 경찰청장과 경찰 수사팀 사이의 '갈등'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조 청장이 이토록 민감한 수사 진행 상황에서 배제됐다가 별안간 전면에 나섰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지금까지 스스로가 이끌었던 경찰의 온갖 판단을 뒤집어, 수사를 둘러싼 모든 책임을 수사 실무진에 떠넘기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게 상식에 부합할 것이다.

한편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12월16일 김아무개 전 국회의장 비서관을 소환 조사했다. 권력의 끝자락에도 가닿지 못한 경찰 수사의 전말에 대해 이번에는 검찰이 성큼 다가서고 있다는 뜻이다. 경찰과 권력을 둘러싼 거짓말 릴레이의 끝이 어디에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특별취재팀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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